경종의 슬픈 두드러기[이상곤의 실록한의학]<87>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입력 2020-01-20 03:00:00 수정 2020-01-20 07:54:05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숙종 재위 27년 10월 10일 장희빈이 사사(賜死)됐다. 어머니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세자(후일 경종)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나이 14세. 많은 대신들은 연산군의 전례를 걱정해서인지 장희빈의 처형을 강력히 반대했다. 영의정 최석정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놀라움과 괴로움에 (세자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미치도록 괴로워 성정(性情)을 보전할 수 없다면, 종묘사직을 어찌 보전하겠습니까?”라며 우려했고, 부교리 권상유와 부수찬 이관명도 “어린 나이에 망극한 변고를 당해 만에 하나 성정이 손상될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경종에 대한 의관 김유현의 기록은 의외로 담담하다. “어제 저녁부터 등과 배에 홍반이 여러 개 생겨 가끔씩 가려워했으며 팔다리에는 홍반이 별로 없었습니다. 양명경(대장과 위에 관계된 경락)의 풍열이 피부에 배여 청기산(淸氣散)이라는 처방에 칡(사진)과 황금을 넣어 3첩을 복용했습니다. 처방을 한 지 이틀 후 증상이 순조롭게 좋아졌습니다.” 청기산은 두드러기를 치료하는 대표적 처방이다. 두드러기의 원인은 음식, 약물, 정신적 요인 등이 있지만 경종의 두드러기는 스트레스로 인한 피부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피부가 흘린 눈물이었던 셈.

경종은 대의를 위해 사적 불행과 불운을 뒤로한 조숙형 인간이었다. 경종 즉위 후 유생 조중우가 “아들이 어미를 존귀하게 받드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의”라며 장희빈의 작위가 서인(庶人)에 머물러 있는 것을 문제 삼으며 “작호를 더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경종은 대신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치자 조중우에게 장형을 내리고 유배를 보냈다. 조중우는 결국 유배 중 길 위에서 죽고 말았다. 광폭한 군주로 일평생을 산 연산군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경종은 강인한 신념으로 자기를 이겨 나갔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나눠 주지 않는 권력을 이복동생에게 넘겼다. 일찌감치 영조를 세제로 삼은 것.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최악의 앙숙이었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며 발고한 인물도 숙빈 최씨였다. 경종은 세제 임명 후 영조를 끝까지 지지하고 응원했다. 노론과 남인이라는 정치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유일한 왕통 영조를 지켜 나갔던 경종. 그는 의리와 신념, 극기(克己)의 상징이자 대인배였다. 경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승정원으로 하여금 궁궐 출입증에 새길 글씨(표시)를 통(通)자로 정했다. 이 글자는 경종이 영조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노론, 남인과의 소통, 백성과의 소통, 성리학의 이치를 현실정치로 통하게 하는 학문적 소통을 구현하는 의미다. 탕평정치의 뿌리는 어쩌면 경종의 희생과 신념을 바탕으로 영조가 꽃피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일까. 경종은 재위 4년의 짧은 기간 동안 뇌전증과 말더듬증으로 고생했다. 노론은 그를 ‘바보 임금’이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경종을 죽인 건 오히려 바로 그 당파였다. 경종의 몸은 모친의 비극적 죽음과 당파 정치의 혼란 속에서 급속도로 망가졌다. 어쩌면 경종은 조선 민중의 분노와 고통을 안은 채 스스로 산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