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 높이려 업무 동시처리 했더니… “순서 안지켜” 호된 감사

김준일 기자 , 고도예 기자 , 임보미 기자

입력 2020-01-17 03:00 수정 2020-01-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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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7> 적극행정 막는 감사 공포증


2015년 5월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은 경기 안산시 반월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서울반도체 1, 2공장의 연결통로 공사 계획을 승인했다. 두 공장 간 직선거리는 180m에 불과했지만 각종 규제로 연결통로를 둘 수 없어 1.2km를 돌아가야 했다. 회사 대표가 2014년 3월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규제 개선을 건의하는 등 노력을 계속한 끝에 5년 만에 해묵은 규제가 풀렸다.

이 과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장기간 규제 해소에 어려움을 겪은 근본적인 이유로 공무원들의 감사에 대한 공포를 들었다. 담당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규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특정 기업의 애로사항을 풀어주면 ‘기업과 유착한 것 아니냐’는 시선이 생기고, 이어 감사까지 받게 될까 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것. 이 관계자는 “공무원들은 감사원 감사를 ‘걸면 걸린다’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 인식은 경험을 통해 생긴 것”이라고 했다.

감사원 감사는 예산 낭비와 공직기강 해이를 막아주는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다. 최상위법인 헌법에서도 감사원 감사 기능을 보장한다. 그러나 현재의 감사 시스템은 공직 사회에 감사 공포증을 심어주고 적극 행정을 가로막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 “정해진 것 외엔 하지 말라” 체득된 공포

적극적으로 일했다가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인식은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쌓이기 시작한다. 중앙부처 고위공무원 A 씨는 사무관 시절 연구개발(R&D) 사업 평가 업무를 맡았다. 주어진 인력은 없고 동시에 여러 일이 몰아치는 가운데 마감시한도 촉박했다. 그는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총 6단계의 업무 중 4, 5단계 업무를 동시에 처리했고 일을 기한 내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감사원 직원들은 “업무 처리 순서를 지키지 않았다”고 문제 삼았다. 서류에 ‘사인이 있니, 없니’로 며칠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는 게 그의 기억이다. A 씨는 “수많은 공무원들이 감사원 징계 위험을 겪어 봤기 때문에 ‘정해진 것 외에는 하지 말라’는 분위기가 공직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공무원들의 인식은 대통령도, 감사원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공직자가 공익을 위해 업무를 적극적으로 처리했을 경우 고의나 중과실, 절차적 하자가 없으면 징계를 하지 않는 ‘적극 행정 면책제도’를 법제화했다. 또 제도나 규정이 불분명해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 감사원이 검토해 의견을 제시하고, 컨설팅 내용대로 업무를 처리하면 향후 감사 과정에서 책임을 면제해 주는 ‘사전 컨설팅’ 제도도 만들었다.

그럼에도 공무원들은 제도가 취지대로 운영될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감사원이 옳고 그름을 쉽게 결론내기 어려운 정책적인 판단에 ‘사후 평가 잣대’를 대왔기 때문이다. 감사원이 본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정부에서는 좋은 사업이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나쁜 사업이 됐다. 해외 자원개발도 마찬가지다. 경제부처의 한 과장은 “지금의 대통령과 감사원은 믿는다. 그런데 정권 교체 이후 감사원은 못 믿는다”고 했다.


○ 정책 성과보다 특정감사 비중 높아

공무원들은 특히 감사원의 정책 감사에 불만이 많다. 중앙부처 출신 B 씨는 “정부 사업의 예산 사이클은 2년 정도인데 정책을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 그러면 감사원에서 ‘환경이 바뀌었는데 잘못된 정책을 폈다’며 감사를 한다”고 했다. 경제부처 공무원 C 씨는 “공무원들은 보통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진 뒤 정책을 추진한다”며 “그런데 갑자기 감사원 직원이 나와 무조건 정책이 잘못됐다고 윽박지르면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감사원이 정책 성과를 분석하는 ‘성과감사’보다는 ‘특정감사’라는 이름으로 법령 해석, 절차 준수 여부 등의 감사를 하다 보니 공무원들은 정책 달성 여부보다는 문서와 형식에 집착하게 된다. 실제로 2017, 2018년 성과감사는 각각 9건, 13건에 불과했지만 특정감사는 101건, 123건에 달했다. 오스트리아(94%), 스웨덴(90%), 미국(80%) 등 선진국은 성과감사 비중이 높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책 자체에 대한 감사는 국회에서 하도록 하고 감사원은 회계감사나 직무에 관련된 비위, 사생활 문제 감찰 등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우리는 정책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보는 게 아니라 절차나 법령을 지켰는지 보는 것”이라며 “감사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내부 교육도 하고 외부 전문가 의견도 구하고 있다”고 했다.

김준일 jikim@donga.com·고도예·임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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