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 추진력-발상의 전환… 유럽-日 콧대 꺾고 조선 최강 ‘우뚝’

김현수 기자

입력 2020-01-02 03:00 수정 2020-01-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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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13> ‘울산의 기적’ 일군 현대중공업


1974년 2월 15일 오전 1시경. 수문이 열리면서 바닷물이 독 안으로 차기 시작했다. 독 안에는 길이 344m에 이르는 26만 t급 초대형 유조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거대한 무쇳덩이가 과연 뜰 것인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날은 현대중공업의 역사적인 첫 진수식 날이었다. 한국 중공업 사상 처음으로 초대형 유조선이 실제로 물에 뜨는 날이었다. 항만청은 “엔진 시동 없이 배를 띄우는 것은 항해규칙 위반”이라는 웃지 못할 이유로 허가에 뜸을 들였고, 선장들은 방파제 입구가 좁아 배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정 회장은 “배가 망가지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선장 대신 배 위로 올라가 지휘봉을 잡았다. 오전 5시 거대한 유조선은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독에서 벗어나 바다로 나아갔다.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콧등이 시큰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능공들 중엔 흑흑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불굴의 신념과 불철주야 초인적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해준 기능공들이 대견스러웠고 고마웠다.”

1991년 정 회장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에세이에서 현대중공업의 첫 진수식에 대해 이같이 기억했다. 울산 어촌마을 미포만 일대가 세계 1위 조선 강국의 대표 중심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발상의 전환, 번뜩이는 아이디어


“외국에 나가서 고생하느니 몇천만 달러, 몇억 달러짜리 배를 수주해서 국내 조선소에서 우리 기술로 건조하면 해외 건설보다 안전할 것이다.”

정 회장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해외 건설 사업이 베트남전쟁 등으로 갖은 고초를 겪자 조선업을 떠올렸다고 썼다. 정부가 중화학 육성책을 꺼내 들기 전부터 조선업 진출을 고민했다는 의미다.

문제는 돈이었다. 해외에서 4300만 달러를 빌려야 조선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는 1971년 우리나라 경제개발 예산의 15%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정 회장은 먼저 조선기자재 업체를 찾아가 “당신네 회사서 기자재를 살 테니 은행을 좀 움직여 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한 영국의 유력 조선 기술회사인 ‘애플도어’의 찰스 롱보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보텀 회장은 그가 내민 어촌마을 사진만 보고 난색을 표했다. 한국의 상환 능력을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우리 현대의 능력으론 이 사업이 무모하다는 평가인 듯했다. 나는 맥이 쭉 빠졌다. 지금 같으면 주요 인사와 면담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준비하지만 그때는 그럴 여유도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오백 원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정 회장의 유명한 ‘거북선 지폐’ 일화는 임기응변의 결과였다. “한국은 1500년에 이미 거북선을 만들었다”며 열정을 토하는 그를 보고 롱보텀 회장이 마침내 미소를 띠었다. 롱보텀 회장은 바클레이스은행과 연결해 줬을 뿐 아니라 그리스 선사가 싼 배를 찾는다는 귀띔을 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정 회장의 조선 사업을 지원했다.


○ 처음부터 세계와 맞서다

“조선업도 1969년 처음 시도했을 땐 일본 기업과 합작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경영에 간섭하려 하고, 또 생산 규모도 ‘너희 경제 규모를 봐서 5만 t급 선박을 만들 수 있는 시설 정도면 충분하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어느 조선소보다도 더 큰, 세계 제일의 생산능력을 갖춘 독을 계획해서 세계 조선사상 처음으로 배와 독을 동시에 완공했습니다.”

1991년 5월 정 회장은 옛 소련의 칼미크 자치국을 찾아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 연설을 하며 현대중공업이 왜 처음부터 초대형 26만 t급 유조선 건조로 시작했는지 설명했다. 사실 처음에 현대중공업은 일본과 합작사가 될 뻔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산업군이 그랬지만 기술도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 합작하는 게 조선업 진출에 유리해 보였다. 마침 미쓰비시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한국 경제 규모에 맞는 일이나 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1970년 중국이 ‘미국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한국,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주 4원칙’을 발표하자 미쓰비시 측은 중국 눈치를 보며 합작을 못 하겠다고 했다. 현대중공업은 1993년 펴낸 20주년 사사에서 이 사건을 ‘새옹지마’라고 표현했다. 일본이 정한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세계와 맞서는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택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노렸기에 현대중공업은 빠르게 성장해 1972년 조선소 기공식 이후 11년 만인 1983년에는 건조량 기준 조선부문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또 40년 만인 2012년에는 세계 조선업계에서 처음으로 선박 인도 누적 톤수가 1억 GT(총톤수)를 넘겼다.

잘나가던 현대중공업도 2010년 이후 불어닥친 조선업계 불황의 여파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2015년에 1조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낸 현대중공업은 감원과 자산 매각, 사업 재편 등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 1994년 국내 최초로 고부가가치 선종인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을 인도하는 등 기술 개발을 해왔던 LNG 시장이 커지는 것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M&A)을 위해 지난해 6월 중간지주사 격인 한국조선해양을 출범시키며 “세계 어느 나라도 넘보지 못할 기술력을 갖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며 앞으로도 기술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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