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안끝났는데 칠판 교체 공사… 겨울에 나무심기 긴급공고

세종=주애진 기자

입력 2019-12-26 03:00 수정 2020-06-0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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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지자체에 “예산 써라” 독촉



제주의 A초등학교는 이달 중순 24개 교실의 칠판을 바꾸는 공사를 마쳤다. 보통 교내 공사는 안전 문제로 방학 때 하는데 연말까지 예산을 최대한 쓰라는 정부의 방침 탓에 예정보다 한 달 반 정도 앞당긴 것이다. 교체 비용은 2000만 원이 넘었는데 다른 사업에서 쓰지 못해 남은 예산도 일부 포함됐다. 이 학교 관계자는 “각종 비용 정산 주기를 단축하고 자잘한 공사는 주말이나 방과 후를 이용해 미리 하고 있지만 돈 쓰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와 시도교육청은 남는 예산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부가 연말 결산 때 예산 불용액과 이월액이 많은 곳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주기적으로 재정 집행률을 점검하고, 행정안전부는 공사 선금 지급 한도를 최대 70%에서 80%로 늘리고 공사 진척도에 따라 공사비를 미리 계산해 주는 기성금 지급을 활성화하고 있다. 예산 신속 집행 요령을 담은 공문까지 내려보낼 정도다.

25일 기재부에 따르면 9월 말 집행률 63.1%였던 지방재정 집행률은 11월 말 77.1%로 올랐다. 같은 기간 지방교육재정도 71.9%에서 83.3%로 뛰었다. 하지만 기재부가 정한 목표치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 기재부는 연말까지 지방재정 90% 이상, 지방교육재정 91.5% 이상 집행을 목표로 잡고 있다.

정부가 물품 조기 구매 등을 독려하면서 입찰공고도 예년보다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시 공공계약정보 사이트인 ‘서울계약마당’에 따르면 서울 자치구와 소속 기관들이 11월 이후 낸 입찰공고 1626건 가운데 169건이 ‘긴급’ 공고였다. 이 긴급 공고에는 강남구 북카페 도서 구매, 강서구 취약계층 가정용 공기청정기 구입 등 시급하다고 보기 힘든 사업도 다수 포함됐다. 한 구청 담당자는 “행안부에서 요건이 맞는 사업은 가능한 한 긴급으로 빨리 처리하라고 지침이 왔다”고 설명했다.

제주도교육청은 지난달부터 한시적으로 물품 구매 수의계약 기준을 1000만 원 이하에서 2000만 원 이하로 완화했다. 도교육청 관계자는 “수의계약제를 더 투명하게 운영하려 엄격한 자체 기준을 적용했던 건데 빠른 예산 집행을 위해 다시 기준을 풀었다”고 했다.

예산을 빨리 쓰라고 독촉하는 데 세금을 쓰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행안부는 연말에 예산 집행률이 높은 지자체에 총 100억 원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앞서 올 상반기(1∼6월)와 11월 기준으로도 각각 30억 원, 50억 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지자체들은 시군구를 대상으로 자체 인센티브를 걸고 있다. 강원도는 연말에 우수 지자체에 총 22억 원의 인센티브를 줄 계획이다.

일부 지자체 관계자들은 재정 집행 독려에 따른 스트레스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한 광역지자체 예산 담당자는 “10월 대통령의 재정 집행 독려 발언 이후 약 두 달간 기재부와 행안부 주재로 회의가 30∼40차례 열려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며 “정작 집행률 제고 방안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토로했다. 다른 광역지자체 담당자도 “공사 선금이나 기성금은 공사업체가 원하지 않으면 줄 수 없는데 제출 서류가 많아 꺼리는 업체가 대부분”이라며 “공사기간을 줄여 부실 공사를 할 수도 없고 개별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 행정에 답답하다”고 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예산 집행 독려가 경기에 도움을 주는 효과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무리하게 자금을 집행하면 예산이 엉뚱하게 쓰일 가능성도 크다”며 “빨리 쓰기보다 재정을 제대로 쓰는 데 더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세종=주애진 기자 ja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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