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 기념식서 ‘안중근체’ 공개

뉴시스

입력 2019-10-25 10:29 수정 2019-10-2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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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거행
안중근 의사 손글씨 서체로 제작…무료 배포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하얼빈역 의거 11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손글씨 서체로 제작한 ‘안중근체’가 공개된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 주관으로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 기념식을 연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기념식은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의거 110주년을 맞아 거행된다.

이병구 국가보훈차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안중근 의사의 유족 증손자 토니 안, 외손녀 황은주,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및 회원, 안중근함 함장 홍승택 대령 및 승조원,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다.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 의거의 이유 낭독, 기념사, ‘안중근 안쏠로지’ 도서발간 봉정, 안중근체 공개, 안중근장학금 수여, 기념공연,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의거 11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손 글씨 서체(폰트)로 제작한 안중근체가 기념식에서 첫 공개한다.

안중근 의사가 자필로 남긴 ‘장부가’의 원본을 토대로 한글 필적을 추출해 개발한 안중근체는 일반 컴퓨터의 사용성과 활용성을 고려해 만들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과 한국저작권위원회 홈페이지 등에서 무료로 배포할 계획이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2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 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했다.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사재를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에는 의군장으로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대일 항전을 펼쳤다.

이후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과 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구국의 방도를 모색했고, 1909년 봄에는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다.

1909년 9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의거 당일인 10월26일 9시께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격을 가해 모두 명중시켰다.

일본 헌병이 체포하려는 순간에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다.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한 그는 1910년 2월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월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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