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근로제 확대안, 합의한다면서 8개월 지났는데…보완책 나올까?

유성열기자

입력 2019-10-17 18:33:00 수정 2019-10-17 18: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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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서로 상생하는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김주영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대타협이 이뤄졌다. 앞으로 노사문제가 발전적으로 진보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린다.”(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올 2월 19일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 회의실에서 모처럼 훈훈한 광경이 연출됐다. 노사정 대표들은 이날 탄력근로제의 운용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기로 전격 합의했다. 근로시간 법제의 유연성을 넓혀 주 52시간 근로제의 부작용을 보완하고 기업의 대응여력을 높이는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이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위원장도 “국민께 희망이 되는 소식”이라며 “노사가 갈등만 벌이는 게 아니라 합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장 법제화할 것 같던 탄력근로제 확대안은 8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야 의견 차로 올 안에 통과할지도 장담할 수 없다. 정부가 사회적 대타협이라며 자랑했던 탄력근로제 확대안이 표류하게 된 과정을 추적해봤다.



● 노사 한 발씩 양보한 합의

탄력근로제는 근로시간을 늘렸다 줄여서 주당 평균근로시간만 주 52시간에 맞으면 합법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에어컨, 아이스크림 등 계절에 따라 수요가 요동치는 제조업이나 대학입시처럼 특정 시점에 업무가 폭증하는 분야는 주 52시간을 준수하기 어렵다. 이런 분야에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 바쁠 때 바짝 일하고 한가할 때 푹 쉴 수 있게 된다.

문제는 현행법상 탄력근로제의 운용기간이 최장 3개월로 묶여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한 달 반까지만 주 52시간을 넘겨 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경영계는 주 52시간제 시행에 맞춰 운용기간을 최장 1년으로 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최장 6개월은 주 52시간을 넘겨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과로 가능성과 임금 감소를 우려해 탄력근로 확대에 강하게 반대했다. 탄력근로가 늘어나면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는 기간이 길어져 근로자의 건강권을 위협받을 수 있고 초과근로수당도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사노위는 양측의 요구를 절묘하게 절충했다. 일단 운용기간은 6개월로 넓혀 일이 많은 3개월은 주 64시간, 일이 적은 3개월은 주 40시간만 일하도록 허용했다. 다만 근무일 사이에 11시간 휴식을 의무화하는 과로방지 장치를 넣기로 했다. 예를 들어 탄력근로 기간 오후 11시에 퇴근했다면 이튿날에는 오전 10시 이후 출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탄력근로를 도입하려는 사용자는 임금 보전 방안을 마련해 고용부 장관에게 신고하게 했다. 신고하지 않은 사업주에게는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다.

탄력근로 확대에 대한 노사정 합의는 이처럼 노사 양측이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한 발씩 양보한 결과였다. 합의대로 국회가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면 주 52시간제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모았다.


● 8개월간 효력 못 낸 합의

노사정 합의는 시작부터 암초를 만났다. 경사노위법상 합의문이 효력을 가지려면 본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경사노위는 3월 7일 본위원회를 열고 합의문을 의결하기로 했다. 이 회의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주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근로자위원인 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과 나지현 전국여성노조 위원장,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이 본위원회 하루 전인 6일 불참을 통보했다. 청년 여성 비정규직 대표인 자신들이 탄력근로 확대 논의에서 배제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본위원회는 무산됐고 노사정 합의문도 의결되지 못했다. 경사노위법상 의결정족수를 채우려면 노사정 각 위원의 과반수가 출석해야 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경사노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근로자위원은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청년 여성 비정규직 대표 등 4명뿐이었는데 이 중 3명이 빠지면 안건 의결이 불가능하다. 근로자위원 3명이 본위원회에 불참하는 ‘전략’을 통해 합의문의 의결 자체를 봉쇄해버린 셈이다. 문 위원장의 간곡한 설득에도 이들은 불참을 고수했다.

노동계에서는 근로자위원 3인의 불참 결정에 민노총과의 교감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앞서 민노총은 경사노위가 근로자위원을 위촉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때문에 탄력근로 확대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민노총이 장외에서 판을 깨버렸다는 지적이 많았다. 김 위원장은 “소외계층 대표들을 겁박하고 회유해 사회적 대화를 무산시킨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태”라며 민노총을 비난했다.


● 국회 탄력근로 확대 논의도 공전

노사정 합의가 효력을 내지 못하자 국회 논의도 공전을 거듭했다. 야당은 노사정 합의가 효력이 없는 만큼 경영계 상황을 최대한 고려해 탄력근로제 운용기간을 최장 1년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당은 경사노위에서 합의한 대로 처리하자고 맞섰다.

여야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고 시간만 흐르자 야당은 6월 임시국회에서 대안을 냈다. 탄력근로제 운용기간은 여당의 주장(6개월)을 수용하는 대신 현행 1개월인 선택근로제의 정산기간을 3~6개월로 확대하는 이른바 ‘패키지 딜’을 제안했다.

선택근로제도 업무량에 따라 근로시간을 늘렸다 줄여서 주 52시간에 맞추는 제도로 탄력근로제와 비슷하다. 다만 사전에 일할 시간을 정하는 탄력근로제와는 달리 선택근로제는 근로자가 자율적으로 일하고 사후에 근로시간을 정산한다. 근로자가 재량껏 일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는 연구개발(R&D)이나 정보기술(IT) 분야 등은 탄력근로제보다 선택근로제가 주 52시간을 준수하는 데 유리하다. 경영계는 선택근로제도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노동계는 탄력근로제가 확대되는데 선택근로제까지 확대되면 과로가 일상화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여당 역시 “탄력근로제 확대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야당의 제안을 거절했다. 야당은 50~299인 기업의 주 52시간제 시행(내년 1월 1일) 자체를 연기하거나 1주 8시간의 특별연장근로를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께 펼치고 있다. 여야 모두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국회 논의는 8개월째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 “투 트랙 접근해야 실효성 확보”


경사노위가 식물상태에 놓이자 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합의문 의결을 반대한 근로자위원 3명을 포함한 위원 11명을 해촉하고 새 위원들을 위촉했다. 문 대통령은 문 위원장을 유임시켜 2기 사회적 대화도 맡겼다. 경사노위는 11일 본위원회를 열고 탄력근로제 합의문을 의결했다. 노사정 합의 8개월 만에 합의문이 효력을 갖게 된 셈이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하지만 여야의 이견을 좁힐 복안이 지금으로선 마땅하지 않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의 시행연기론이나 특별연장근로 확대에 대해 “근본적 처방이 아니다”고 선을 긋고 있다. 다만 정부는 국회 논의가 무산될 경우를 대비해 계도기간 부여와 시행규칙상 특별연장근로 확대 등 법 개정 없이 정부가 할 수 있는 보완책을 검토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정부 조치의 폭은 국회 논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부 조사 결과 50~299인 기업 10곳 중 4곳 정도는 아직 주 52시간제를 준비하지 못한 터라 국회 입법이든 정부 행정조치든 보완책은 꼭 필요하다.

노동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투 트랙 방식’으로 접근해야 주 52시간 논란을 해소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시간 단축의 방향은 타당하지만 개별 업무의 속성이나 기업 상황을 감안할 수 없는 ‘규제의 획일성’이 문제”라며 “정부가 근로자 건강권을 법으로 보호하되 일본이나 독일처럼 노사의 자율적 합의와 판단 여지를 열어줘야 현장의 수용력과 실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어 “국회가 탄력근로제를 정치적 사안이 아닌 민생문제로 보고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며 “국회 입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정부가 시행규칙 개편으로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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