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경영개입 확대 우려”… 재계 ‘5%룰 완화’ 전면철회 요구

허동준 기자

입력 2019-10-17 03:00 수정 2019-10-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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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 반발 확산
‘연기금 주주권 행사’ 통제장치 줄여 해임청구-정관 변경 요구 쉬워져
“기업에 정치권 입김 작용 소지… 선진국은 되레 공시의무 강화”


정부가 지난달 입법예고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안’에 대해 재계가 전면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시행령 개정안의 골자는 상장사 주식의 5% 이상 대량 보유한 기관투자가의 보고 및 공시 의무를 완화해 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실상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가의 경영 개입 권한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시행령 개정안은 투자자의 경영 개입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범위를 축소해 기업의 경영권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다”며 “전면 철회를 건의하는 경영계 의견을 정부에 제출했다”고 16일 밝혔다.

야당도 정부의 움직임에 반발하고 있다. 자본시장과 기업 경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국회 동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시행령 개정만으로 제도를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전날 “입법권을 무시한 처사”라며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해 정부의 시행령 개정에 제동을 걸었다.

정부는 지난달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에 발목을 잡아 온 이른바 ‘5% 룰’을 완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표하고 입법 예고했다. 이날로 입법 예고 기간이 끝나면 규제개혁위원회와 법제처 심사를 거쳐 내년 1분기(1∼3월) 중에 본격 시행한다는 입장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5% 이상 지분 보유 목적을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과 ‘단순투자’로 구분한다. 경영 목적이 있으면 지분의 보유 목적과 자금 조성 내용 등을 5일 내로 상세히 금융감독위원회 등 관계당국에 보고하고 공시하도록 돼 있다. 단순투자는 약식보고를 하면 된다.

이번 정부 개정안에서는 공적연기금은 경영 목적이 있어도 5일 내로 약식보고만 하면 되도록 했다. 무분별한 주주권 행사의 통제 장치 역할을 한 상세 보고 의무가 사라진 것이다. 상세 보고 의무는 매우 중요하다. 만일 보고 내용을 거짓으로 기재하거나 중요한 사항을 누락하면 투자자(개인 또는 법인이나 기관)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기 때문이다.

주주의 ‘경영 개입’ 행위도 단서를 추가하거나 규정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인정 범위를 줄였다. 경영 개입 행위를 할 경우 보고 의무가 생기므로 의무가 생길 상황을 줄인 것이다.

공적연기금의 정관 변경 요구를 경영 개입 인정 범위에서 제외했다. 정관은 지배구조 등 기업 경영의 가장 핵심적인 규율을 담고 있다. 주주가 손해가 생길 염려가 있을 때 위법 행위 중단을 청구하는 ‘위법행위 유지청구권’과 주주총회에서 임원 해임이 부결됐을 경우 법원에 해임을 청구할 수 있는 ‘해임청구권’도 경영 개입 행위에서 제외됐다. ‘대외적인 의사표현’도 제외됐고 ‘배당정책 변경 요구’는 아예 삭제됐다.

경총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주요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대량 보유한 투자자는 국민연금과 외국계 투기펀드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현재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과 노사 대표,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돼 있어 스튜어드십 코드 운영을 통해 정치권의 기업 경영 개입과 규제 메커니즘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과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은 3% 지분 보유 시 2일 이내에 보고하도록 하는 등 보고와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추세다.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은 “공적연기금의 공시 의무를 일반 투자자보다 오히려 더 약하게 규정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시행령 개정만으로 기업 경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를 바꾸는 것은 과도한 개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안 그래도 한국은 경영권 방어수단이 미흡한데 이제는 국민연금뿐 아니라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펀드도 임원 해임,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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