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생 로랑’은 인턴 입사 3년만에 어떻게 디올 수석 디자이너 올랐나

뉴스1

입력 2019-10-14 08:36:00 수정 2019-10-14 08: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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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인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났다. 디올의 첫 번째 후계자가 누가되느냐가 글로벌 패션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후계자로 지목된 이는 깡마르고 소심한 청년이었다. 그는 알제리 출신의 ‘이브 마티유 생 로랑’. 생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에 인턴으로 입사한지 3년 만에 최고 자리인 수석 디자이너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21살에 크리스찬 디올 수석 디자이너로…

생 로랑은 떡잎부터 달랐다. 어린 시절 감명 깊게 본 루이 주베 감독의 연극 ‘아내들의 학교’를 보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연극 속 인물의 의상을 11살에 직접 만들 정도로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는 주로 10대 학생들이 다니는 파리의상조합학교 수업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3년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의 도움 없이도 그의 재능은 빛났다. 국제 규모의 민간단체인 국제양모사무국의 콘테스트에 두 차례 수상했다.

19살의 나이에는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의 인턴 기회를 잡았다. 입사 3년 만에 디올의 최고 자리에 오르자 그가 꽃길을 걸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비트족’(1950년대 전후 저항적인 문화를 추구했던 젊은 세대)을 겨냥한 패션을 선보이면서 상류층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점점 디올에서 그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때 그는 27개월짜리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출신인 그는 군에 입대해 알제리 독립을 위해 참전했다.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복무 3주 만에 병원에 입원했다. 디올 수석 디자이너 자리마저도 다른 이에게 넘겨줘야 했다.

◇동성연인 ‘피에르 베르제’와의 만남…디자이너 ‘인생 2막’ 시작

전쟁은 그를 신경정신질환에 시달리게 했다. 생 로랑은 술·담배·마약 등에 의존했다. 그때 생 로랑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패션사업가인 ‘피에르 베르제’이다. 두 사람은 크리스찬 디올의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같은 성별이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아껴주고 큰 힘이 되는 연인사이였다. 베르제는 생 로랑의 사업파트너이자 패션가에서 생로랑이 부활하는 데 가장 기여한 사람이다. 그는 2008년 생 로랑이 생을 마감하전까지 그의 옆을 지켰다.

“생 로랑은 그의 세계에 완전히 갇혀있었습니다. 베르제는 그와 바깥 세상을 연결해주는 다리였습니다.”

생 로랑, 베르제와 함께 영화 작업을 한 제작자 올리버 메이루(Olivier Meyrou)가 최근 할리우드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생 로랑은 1962년 1월 29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선보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다음해에는 입생로랑 이니셜을 사용한 디자인 로고도 내놨다. 이 로고는 지금까지 화장품, 향수, 액세서리 등에 사용되며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성을 위한 턱시도부터 기성복까지…‘혁명의 아이콘’

패션가에서 생 로랑은 21세기 현재도 ‘혁명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그는 ‘르 스모킹’ 컬렉션에서 여성에게 화려한 드레스 대신 ‘턱시도’를 입히며 성 고정관념을 깼다. 그의 패션은 당시 여권 신장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종종 청바지를 발명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청바지는 가장 획기적이고 실용적이다. 무심한 듯 하면서 차분하다. 청바지는 단정함, 단순함 등 내가 나의 옷에서 바라는 모든 표현이 담겨져 있다.”(생 로랑)

그는 기성복 라인 ‘생 로랑 리브 고슈’도 선보였다. 상류층만의 전유물로 여겨진 패션에 실용성을 가미해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들었다. 그가 선보인 기성복은 직장에 출근하고 신문을 보는 현대 여성상을 반영한 실용적인 옷들이었다.

아침 출근길 여성들이 입고 있는 모든 정장 바지도 그의 패션 디자인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재능만으로 승부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한 노력파였으며 여성 기성복을 끊임없이 탐구한 연구가였다. 패션계 사람들은 그를 ‘천재’를 넘어선 ‘거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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