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마련 진입장벽 된 ‘9억’… 실수요자들 대출숨통은 터줘야[인사이드&인사이트]

김호경 산업2부 기자

입력 2019-10-14 03:00 수정 2020-10-1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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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주택 기준’ 실효성 논란
9억 넘으면 중도금 대출 안돼… 분양가의 60%는 직접 조달해야
현금부자 아니면 구입 꿈 못꿔…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이 9억 육박
고가주택 기준은 11년째 그대로… “서울에선 이미 낡은 기준” 지적
“기준 올리면 집값 부채질” 반론… 정부도 당장 올릴 계획 없다고 밝혀




김호경 산업2부 기자
‘9억 원 아파트가 고가 아파트인가요?’

8일 회원 15만여 명을 보유한 유명 포털 부동산 커뮤니티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국토교통부가 9억 원이 넘는 고가주택을 보유한 1주택자에 대해 공적 보증을 통한 전세대출을 막기로 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은 올해 3분기(7∼9월) 전국 9억 원 초과 아파트 거래 비중이 5.3%로 2006년 실거래가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였다는 보도들이 쏟아졌다.

댓글창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9억 원이 싼 아파트는 아니지 않냐’며 현재 고가주택 기준을 옹호하는 의견과 ‘서울에서 9억 원 이하 아파트는 점점 보기 힘들다’며 기준을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 대출 규제가 부른 ‘고가주택 기준’ 논란

지난해 정부가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한 ‘9·13 대책’을 내놓은 뒤 9억 원인 고가주택 기준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는 서울에서 9억 원 넘는 주택이 최근 급등했는데 정부가 대출을 옥죄면서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불만이 깔려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9억 원’은 매우 중요한 숫자다. 양도소득세나 취득세처럼 주택 거래가 발생했을 때, 실거래가 9억 원을 넘으면 고가주택으로 고율의 세금이 부과된다. 종합부동산세(종부세)처럼 실거래가 자체가 없거나 대출 규제 때에는 공시가격 9억 원을 경계로 규제 여부가 갈린다.

현재 분양가가 9억 원이 넘으면 공적 보증을 통한 중도금 대출을 받을 수 없다. 분양가의 60% 수준인 중도금을 직접 조달해야 한다. 투기지역이나 투기과열지구에서는 공시가격 9억 원이 넘는 기존 주택에 대한 주택담보대출이 원칙적으로 막혀 있다. 지난달 출시돼 화제를 모았던 ‘서민형 안심전환대출’도 주택 가격이 9억 원을 넘으면 신청 자체를 할 수 없었다. 9억 원 초과 주택은 정부가 주택 구입을 지원해야 할 ‘서민’이 살 만한 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더 많은 세금이 부과된다. 9억 원이 넘는 주택을 팔면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 취득세와 부동산 중개수수료율도 9억 원이 넘으면 껑충 뛴다.


○ 11년간 제자리인 고가주택 기준

고가주택에 대한 개념과 법이 처음 생긴 건 1994년 소득세법 시행령이었다. 당시엔 공동주택의 경우 전용면적 165m² 이상이면서 양도가액이 5억 원(시세 약 10억 원)을 초과하면 고가주택이었다. 1999년 금액 기준이 ‘실거래가 6억 원 초과’로 바뀌었고, 면적 기준이 사라졌다. 이후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8년 10월 금액 기준이 ‘실거래가 9억 원 초과’로 올랐다.

당시 정부는 고가주택 기준을 올린 이유를 ‘주택가격 상승률을 반영하고, 6억 원 초과 9억 원 이하 중산서민층의 양도소득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후 고가주택 기준은 11년간 9억 원에 머물러 있다.

고가주택 기준이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주목받은 건 2005년 종부세가 신설되면서다. 그해 1월 노무현 정부는 조세 부담의 형평성을 높이고 집값을 잡기 위해 종부세를 신설했다. 부과 대상은 모든 주택의 공시가격을 합한 금액이 6억 원이 넘는 주택 보유자였다. 공시가격 6억 원은 시세로 따지면 약 9억 원이다. 결론적으로 양도소득세의 고가주택 기준과 같은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종부세 부과 대상이 된 주택 보유자들은 “주택을 처분해 이익을 본 것도 아닌데 세금을 더 부과하는 건 과도한 재산권 침해”라고 반발하며 위헌소송까지 제기했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1주택자에게 동일하게 종부세를 부과하는 건 과도하다’면서도 ‘종부세 자체가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건 아니다’라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1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부과 기준은 공시가격 9억 원을 초과한 주택 보유자로 완화됐다. 종부세 논란을 계기로 9억 원은 한국 사회에서 ‘부자’와 ‘서민’을 가르는 사회적 기준이 됐다.


○ 서울 9억 원 초과 아파트 11년 새 2배로

이후 논란조차 되지 않던 고가주택 기준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최근이다. 이는 1년 이내 급등한 서울의 집값과 한층 강력해진 대출 규제 때문이다. 이현석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2014년까지 크게 변동이 없던 집값이 최근 급등했고 이에 따라 정부가 고가주택 기준에 따른 고강도 규제를 내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2008년 4억8084만 원이던 서울 아파트 매매 중위가격(가운데 가격)은 2017년 6억5029만 원, 지난해 8억2972만 원으로 급등했다. 올해는 8억7272만 원으로 9억 원에 육박했다.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분양아파트 중 9억 원이 넘는 비율도 늘고 있다. 2016년 서울에서 중도금 대출을 받을 수 없는 분양가 9억 원 초과 아파트의 일반분양 물량은 전체 일반분양 물량의 6.2%였다. 이 비율은 올해 8월 36.3%까지 치솟았다. 3년 전까지 분양가 9억 원 초과 아파트는 주로 서울 강남권에 몰려 있었지만 지금은 마포 용산 성동 동대문 서대문구 등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울에서 공시가격 9억 원을 초과하는 공동주택 비율은 2008년 4.6%에서 2019년 8.2%로 급등했다. 함영진 직방 데이터랩장은 “고가주택 기준은 적어도 서울에선 매우 낡은 기준이 됐다”고 지적했다.

집값은 오르고 있지만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현금 부자가 아니면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지난해 9·13 대책에 따라 공시가격 9억 원 초과 주택의 주택담보대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예외로 인정받더라도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40%로 묶여 있어 나머지 60%는 직접 조달해야 한다.

9억 원 초과 아파트는 대출 규제 때문에 아예 엄두도 못 내고, 9억 원 이하 아파트는 치열한 청약 경쟁 때문에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올해 1∼8월 서울 아파트 평균 당첨 가점 커트라인은 43점이지만, 중도금 대출이 가능한 9억 원 이하이면서 입지가 좋은 단지의 커트라인은 60점을 훌쩍 넘었다. 8년 차 직장인 박모 씨(35)는 올해 서울에서 분양한 9억 원 이하 아파트 4곳에 청약을 넣었지만 모두 떨어졌다. 결혼 3년 차로 자녀 1명을 둔 박 씨의 청약 가점은 29점에 불과하다. 그는 “청약을 통해 내 집을 사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며 “기존 주택 가격도 너무 올라 시세보다 싼 급매물만 기다리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집을 사는 게 너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 “고가주택 기준 현실화” 목소리 크지만

익명을 요구한 부동산 전문가는 “집값뿐만 아니라 물가, 1인당 국민총소득(GNI) 등 어떤 경제지표와 비교해도 현재 고가주택 기준은 현실에 안 맞는다. 최소 12억 원은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실에 안 맞더라도 고가주택 기준을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공인중개업계 전문가는 “서울 집값이 뛴 현 상황에서 고가주택 기준을 올리면 무리해서 집을 사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집값이 더 오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최근 서울 집값 상황만 보고 전국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기준을 조정하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서울의 공시가격 9억 원 초과 공동주택 비율은 올해 8.2% 수준이지만 전국의 9억 원 초과 공동주택 비율은 1.6%로 ‘상위 1%’대다. 2008년 헌재가 종부세가 과도하지 않다고 판단한 근거도 종부세 부과 대상이 전체 인구의 1% 수준에 그친다는 점이었다.

기획재정부는 고가주택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 건 알지만 당장 기준을 올릴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부동산 시장 안정을 정책 기조로 삼고 있는 현 정부가 고가주택 기준을 섣불리 조정할 경우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기재부 관계자는 “1주택자 등 실수요자의 경우 9억 원이 넘는 주택에 살더라도 여러 공제 혜택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무리가 되는 기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고가주택 기준에 대한 불만은 세금이 아니라 대출 규제로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의 진입장벽이 확 높아진 데 따른 것”이라며 “갚을 여력이 되는 실수요자들에게는 대출 규제를 풀어 집을 살 기회를 주도록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집값 안정은 물론 필요하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게 없는 실수요자의 주택 구입마저 막는다면 이는 또 다른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수 있다. 일부 금수저 현금 부자가 아니더라도 내 집 마련의 꿈을 꿀 수 있도록 현실적인 고가주택 기준 마련 및 대출 규제 완화를 검토해볼 시점이다.


김호경 산업2부 기자 kimh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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