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불량 상태” 日수출규제 100일 맞는 기업들

유근형 기자 , 이새샘 기자 , 세종=최혜령 기자

입력 2019-10-05 03:00:00 수정 2019-10-05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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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日 수출규제 100일… 버티는 기업들
불화수소 국산화 착착… 급한 불 껐지만 여전히 불안


《“한마디로 소화불량 상태다.”

일본 정부가 7월 1일 대(對)한국 수출 규제 방침을 밝힌 지 곧 100일이 된다. 4일 국내 반도체 대기업의 고위 인사는 현 상황에 대해 “소화가 안 된다”고 표현했다. 큰 고비는 넘겼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의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배제했지만 ‘생산 차질’은 빚어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이 기간에 7건의 수출 허가를 내줬고, 우회 수입 및 국산화 등이 추진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대체재 찾기에 일부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들은 불확실성을 경영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보고 있어 현재와 같은 상황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안진호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글로벌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일본 소재 업체들의 공급 없이는 한 발도 전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결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산업계의 소화불량을 해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우리를 규제할 방법은 차고 넘친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반도체 관련 국제학회에 다녀온 한 업계 관계자는 4일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선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한 국내 업계의 타격이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언제든지 다시 위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얘기였다.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일본이 7월부터 수출을 규제한 3개 품목 말고도 한국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소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소재업체의 공급이 끊기면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전자업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한일 경제 갈등이 하루빨리 외교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8일이면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지 100일이 되지만 일본 정부는 4일 현재 규제 품목에 대한 허가를 단 7건밖에 내주지 않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기체)는 3건씩 허가했다.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1건만 허가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반도체용 액체 불화수소에 대해서는 유엔 무기금수국가에 적용되는 각종 서류 제출을 요구하며 수출 허가를 아직 내주지 않고 있다.

그동안 정부가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 부담은 오롯이 기업들의 몫이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일본에 70∼90%를 의지해오던 핵심소재의 대체재를 찾기 위해 불철주야 움직였다.



○ “불확실성, 대외 리스크 여전”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의 기업들은 최악의 상황에선 일단 벗어났다는 분위기다. 특히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으로 우려됐던 불화수소는 대체재를 확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초고도 공정에 필요한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는 일본 업체의 해외 공장을 통한 우회 수입을 통해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액체 불화수소는 국산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9월부터 민감도가 떨어지는 반도체 공정 일부에 대해 솔브레인 등 국내 업체가 만든 불화수소를 대체 투입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도 중국산 원료를 수입해 재가공하는 램테크놀로지의 액체 불화수소로 연간 사용량의 절반가량을 충당할 계획으로 최종 품질시험을 마무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재의 속도로 진행되면 1년 안에 일본 불화수소에 대한 의존도를 약 30∼40%까지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반도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불화수소 국산화가 이뤄지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이달까지 생산라인에 투입되는 액체 불화수소의 100%를 국산화할 예정이다. 삼성디스플레이도 국산 불화수소에 대한 테스트를 마치고 조만간 생산라인에 투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급한 불은 껐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는 게 기업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한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인데, 마치 극일을 했다는 식으로 포장될까봐 걱정”이라며 “새로운 투자를 한다든지, 과감한 공정 변화를 주기에는 소재 공급망이 여전히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 중소기업 고통은 대기업보다 심해


중소기업 중에서도 국산화에 성과를 거둔 곳들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원자재 수입이 지연돼 어려움을 겪던 소재·부품기업 A사 관계자는 “유사한 특성을 가진 국산 원자재로 테스트를 반복하고 있는데 만족할 만한 성능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며 “그동안 일본 측을 믿고 거래해 왔는데 이번 일로 언제든 거래가 중단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국산화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기업보다 해외 네트워크가 약한 대다수 중소기업은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한 수출 환경 악화와 대외적 불확실성에 대한 피로감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문구류 제조기업인 B사는 일본의 수출 규제 방침이 발표된 직후 화학물질인 안료 수입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제3국으로 수출할 물량의 납기를 맞추기 어려워져 직원들을 총동원해 대체 소재를 찾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기업에 납품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품 수출이 내년으로 미뤄지는 일도 생겼다. 일본 측이 “일본 내에서도 한국 제품을 불매하자는 얘기가 나와 ‘메이드 인 코리아’를 팔기가 부담스럽다”며 이같이 결정한 것이다.

이 기업 관계자는 “생산라인을 확충하고 일본 측에 공장 설비 및 제품 품질 점검까지 받아 완료했는데 공장을 놀리고 있다”며 “수출은 수출대로, 수입은 수입대로 막히니 중소기업은 버티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지난달 3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99개 중소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주요 소재·부품 조달 리스크에 대해 설문한 결과 응답 업체의 절반에 가까운 45.7%가 ‘1년 전에 비해 리스크가 높아졌다’고 답했다. ‘해외 조달 리스크가 상승했다’는 업체는 43.2%로 국가별로는 일본(33.7%)과 중국(17.6%)이 많았다.

소재·부품 조달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대체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을 묻는 질문에 ‘대체 불가능하다’고 답변한 비중도 전체의 14.8%를 차지했다. 대체 불가능 또는 대체에 1년 이상 소요되는 사유로는 ‘품질 저하’(35.8%)가 가장 많았다.



○ “결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풀 문제”


한일 경제 갈등은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장기화 국면으로 흐르고 있다. 최소 1∼2년에서 많게는 수년까지 갈등이 지속될 것이란 전문가들의 예상도 나온다.

하지만 한일 양국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강경하다. 한국 정부는 9월 11일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 정부를 제소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 제외에 맞서 한국 정부도 일주일 뒤인 18일부터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양국은 이달 WTO의 분쟁 해결 절차에 따라 양자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지만 급격한 관계 개선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허가를 찔끔 내준 것은 WTO 제소에 대비하기 위한 명분 쌓기 측면이 강하다”며 “한국 통상당국은 일본이 자유무역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대전제 아래 제소 등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한일 기업인들은 양국 관계 복원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일경제협회와 일한경제협회는 지난달 24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제51회 한일경제인회의를 개최하고 “정치·외교는 긴장감이 있더라도 민간 교류, 경제 교류는 활발히 지속해 글로벌 마켓에서 좋은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도 11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도쿄에서 간담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일본상공회의소와 대한상공회의소의 교류도 이르면 내년 봄 재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수출 규제 100일 동안 공급망 다변화 등 국내 기업들의 기초체력이 좋아진 측면도 있지만, 촌각을 다투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일관계를 이대로 두고 가는 건 너무 큰 리스크”라며 “정부가 국가의 체면을 지키면서도 일본과 협력할 부분을 찾는 유연한 태도를 가질 때가 왔다”고 말했다.

유근형 noel@donga.com·이새샘 / 세종=최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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