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Case Study]게임하며 스스로 글 깨치게… 문맹퇴치 마법 SW

이방실 기자

입력 2019-08-28 03:00 수정 2019-08-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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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학습SW 경진대회 우승한 교육앱 에누마의 ‘킷킷스쿨’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의 시상식이 5월 1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서부 플레이야비스타 구글캠퍼스에서 열렸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오른쪽 여성이 이수인 에누마 대표, 왼쪽 남성이 이건호 에누마 공동대표 겸 최고기술책임자(CTO)다. 가운데는 이 대회를 후원한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에누마 제공
“태블릿PC 한 대만 있으면 아프리카 문맹 아동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도 스스로 글을 깨치고 셈도 할 수 있게 해 주는 학습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라!”

2014년 9월 개발도상국 아동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기획된 국제 학습 소프트웨어 경진대회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가 내건 주문이다. 대회에 걸린 상금 액수는 총 1500만 달러(약 180억 원). 남아공 출신으로 개도국 문맹 퇴치에 관심이 큰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후원자로 나서 상금을 쾌척했다.

장장 5년에 걸쳐 진행된 이 대회는 올 5월 15일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그간 전 세계 198개 팀이 학습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출품했고, 이 중 5개 팀이 결승에 올랐다. 이후 2017년 12월부터 15개월 동안 탄자니아에서 약 3000명의 문맹아를 대상으로 현장 테스트를 실시했고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2개 팀이 공동 우승자로 선정됐다. 바로 영국의 비영리단체 원빌리언과 한국인 대표가 이끄는 실리콘밸리 교육 스타트업 에누마다.

에누마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 출품한 유일한 한국인 팀이다. 심지어 10년 넘게 아프리카에서 교육 사업을 벌여 왔던 원빌리언과 달리 아프리카에 대한 기본 지식과 경험도 전무했다. 그런데도 에누마는 전 세계 내로라하는 팀들을 제치고 문맹 아동을 위한 학습 소프트웨어 ‘킷킷스쿨(Kitkit School)’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에누마의 킷킷스쿨 개발 과정과 성공 요인에 대해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집중 분석했다. DBR 279호(8월 15일자)에 소개된 주요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 게임 설계 기법 적용한 학습 앱 개발

에누마는 엔씨소프트 개발자 출신인 이수인·이건호 부부가 2012년 미국 버클리에 설립한 회사다. 대표 제품은 2013년 선보인 수학 교육 애플리케이션 ‘토도수학(Todo Math)’. 이른바 ‘게임화 기법(게이미피케이션)’을 활용해 학습 장애 등으로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쉽고 재미있게 수학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한 교육 애플리케이션이다.

에누마는 킷킷스쿨을 개발할 때에도 게임화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예를 들어 킷킷스쿨은 동물의 알을 하나하나 터치하면서 그 안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게임을 즐기도록 구성돼 있다. 특히 게임을 하면 닭, 도마뱀 등 각종 동물이 알에서 부화해 나오도록 하면서 ‘잘했어요’라는 칭찬과 별 모양 코인을 주고, 한 달 분량(한 개의 알)의 학습(게임)을 모두 마치면 동물(닭, 도마뱀 등)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식으로 단계별로 다양한 보상을 제공했다. 일반 게임에서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보상 시스템을 학습 소프트웨어에도 적용한 셈이다.


○ 현지 테스트 통해 지속적인 수정


에누마가 개발한 킷킷스쿨이 탑재된 태블릿PC를 사용하며 즐거워하는 아프리카 아이들. 에누마 제공
에누마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는 동안 대회와 별개로 자체 현지 테스트를 실시하며 실제 아프리카 아이들이 킷킷스쿨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면밀히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책 한 권 제대로 접해본 적 없는 개도국 아이들이 문명에 익숙한 선진국 아이들과 얼마나 다르게 행동하는지를 깨닫고 사용자인터페이스(UI)를 수정했다.

대표적인 예가 당초 태블릿PC 화면 맨 오른쪽 상단에 배치해 놓은 톱니바퀴 모양의 ‘설정’ 버튼을 삭제한 것이다. 아이들이 화면 왼쪽의 약 3분의 2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킷킷스쿨 게임 메뉴를 맨 처음 누르지 않고 오른쪽 위에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설정 버튼을 제일 먼저 누르는 바람에 게임을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김형진 에누마 게임 디자이너는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고 스크린도 왼쪽 상단부터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며 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조차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수없이 많은 책을 읽어준 데서 비롯된 학습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이런 사전 학습 과정이 없는 문맹아 입장에선 오른손잡이는 오른쪽부터 화면을 누르는 게 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 UI를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 단어 하나 제대로 못 읽던 아이들이 스스로 글을 깨치는 마법 실현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최종 심사 결과, 킷킷스쿨은 소프트웨어의 우수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내는 데 성공했다. 가령, 아이들이 제한 시간 1분 안에 문장 속 단어들을 몇 개나 읽을 수 있는지 측정하는 테스트에서 킷킷스쿨을 사용하지 않은 아이들은 15개월간의 현장 테스트 전후로 고작 1.98개 단어(0.47개→2.45개)를 더 읽는 데 그쳤지만 킷킷스쿨을 사용한 아이들은 8.86개 단어(0.75개→9.61개)를 더 읽게 됐다.

이런 성과는 킷킷스쿨이 학습자의 경험을 중시한 교육 프로그램 설계를 통해 기초 교육의 패러다임을 교육 ‘공급자’ 중심에서 ‘사용자(학습자)’ 중심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기존의 교육 콘텐츠들은 정해진 학습 목표를 정해진 기간 안에 가르치기 위해 재미라는 측면에서의 사용자 경험은 외면한 채 양적 공급에 치중한 측면이 강했다. 반면 킷킷스쿨은 게임 설계 기법을 십분 활용해 학습자들이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고 콘텐츠에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문맹 아동들이 스스로 글을 깨치는 마법을 실현해 낼 수 있었다.

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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