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생일 초대장 만들어주고… 가족포토북으로 ‘깜짝 선물’

시드니·나라빈=전채은 기자

입력 2019-08-10 03:00 수정 2019-08-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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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시니어’ 시대] <3> 디지털도 시니어의 소통수단
濠 시니어 컴퓨터교육기관 ‘아스카’


6월 호주 시드니 근교 나라빈에 있는 복합 교육 공간 ‘트램셰드 아트 앤드 커뮤니티 센터’를 찾은 날 이른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시니어 일대일 디지털 교육 강좌인 ‘컴퓨터 팔(Pal·친구)’ 수업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전 11시가 가까워지자 빗줄기를 뚫고 빨간 니트를 입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거동이 불편한 나이에도 배우려는 열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순간,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쓰더니 노트북을 열고 강의를 준비했다. 19년째 이곳에서 디지털 교육을 담당하는 윈 닐슨 씨(95)였다. 디지털 교육은 젊은 사람 몫이라는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 ‘노인은 노인이 가장 잘 안다’

닐슨 씨는 호주 최대 시니어 컴퓨터 교육기관인 ‘아스카(ASCCA·Australian Seniors Computer Clubs Association)’의 최고령 강사다. 그는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인 1924년에 태어났다. 수출회사에서 일하다 76세에 은퇴한 후 줄곧 이곳에서 디지털 교육 봉사를 하고 있다. 가르치는 과목은 주로 이미지, 영상 등 편집 프로그램 활용법. ‘코렐드로’라는 고급 디자인 프로그램의 수준급 이용자이기도 하다. 시니어 선생님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당신처럼 젊은 사람들은 많이 배웠고 똑똑하지만, 나이 든 사람을 가르칠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는 않죠.”

미국의 ‘시니어 넷’, 독일의 ‘베를린 미테’ 등 다른 나라에도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컴퓨터 클럽들이 있다. 하지만 비영리 민간단체 아스카의 성장 스토리는 돋보인다. 1998년 60대 6명이 소규모 컴퓨터 클럽에서 시작한 아스카는 현재 호주 전역에 140여 개 클럽, 회원 수십만 명을 보유한 규모로 성장했다. ‘노인은 노인이 가장 잘 안다’는 철학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곳의 핵심적 가치관이다. 이런 모토 덕분에 총 2000여 명에 이르는 아스카의 강사 가운데 65세 이상 시니어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이패드를 사줄 순 있지만 사용법을 가르쳐줄 시간은 없는 자녀들을 대신하자’는 게 바로 아스카의 목표다.


○ “시니어에게도 디지털은 훌륭한 소통 수단”

아날로그 세대가 디지털 기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뭘까. 시니어들이 디지털 기술을 익혀 맥도날드에서 무인 키오스크로 햄버거를 구매할 줄 알게 되면 삶의 질이 더 높아지는 걸까. 아스카에서 만난 강사와 교육생들의 인식은 사뭇 달랐다.

시드니 아스카 본부에서 컴퓨터 강의를 듣고 있는 수전 윌리엄스 씨(67)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시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 중 하나다. 4년 전에 은퇴하기까지 윌리엄스 씨는 은행에서 위험요소 관리자로 30여 년간 일했다. 오래전 일임에도 그는 출산휴가에서 복귀한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휴가 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전산화돼 있었어요. 복귀 첫날엔 ‘회사를 떠나야 하나’라고 생각했고 둘째 날엔 그저 울고 싶었죠. 셋째 날이 돼서야 감이 조금씩 오더라고요.”

소외감과 막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를 열심히 익혔다. 이제 웬만한 디지털 기기를 다루는 데 서툴지 않을 정도지만 지속적으로 새 기술을 익히고 있다.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들뜬 표정으로 “요즘 아스카에서 디지털 ‘포토북’ 강의를 듣고 있다”면서 “가족 포토북을 만들어 내년에 돌아오는 딸의 생일에 ‘깜짝 선물’을 해줄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아스카의 시니어 강사와 교육생들이 꼽은 ‘디지털 기술을 익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은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훌륭한 소통 수단이 됐을 때였다. 아스카 초기부터 21년간 이 단체에 몸담은 난 보슬러 협회장(84)은 “아주 오랜 시간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 왔지만, 새 기술을 배우길 잘한 것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7세 손자가 ‘생일 파티 초대 카드를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을 때”라고 말했다.

아스카 서부 지부를 총괄하는 부협회장 제니 윌콕스 씨 역시 비슷한 대답을 했다. 수많은 수강생을 지켜본 그가 꼽은 최고의 순간은 ‘수강생이 만든 가족 영상이 그의 장례식장에서 상영됐을 때’였다. 윌콕스 씨는 “디지털은 세상을 보다 편하게 살기 위해 배워야 하는 기술이 아니라 다음 세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 및 친구와의 소통 수단이다. 그게 이해될 때 시니어들은 비로소 디지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조언했다.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시니어와 디지털의 ‘첫 만남’을 여는 열쇠도 여기에 있었다.


○ 자원봉사 덕에 지속가능한 성장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스카는 21년간 정부의 정기적인 지원 없이 소액의 회비와 각종 기업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스카 회원들은 연회비 25호주달러(약 2만 원), 분기별 회비 30호주달러(약 2만4000원)를 내고, 시간당 2호주달러 이하의 수업료를 따로 낸다.

기업이나 정부 주도가 아니다 보니 단체 운영에 금전적 어려움이 없지 않다. 다만 그 ‘덕분’에 노인 수강생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른 생활밀착형 수업을 받는다. 일대일 강의에서도 배우려는 의지가 달라진다. 보슬러 회장은 “높은 교육 만족도가 지역 노인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모인 교육생 일부는 새로운 강사로 충원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클럽 관리를 위해 고용한 계약직 직원 2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과 강사가 자원봉사자다. 다만 장소 유지비, 보험료 등을 충당하기 위해 정보기술(IT) 회사, 통신사 등 기업의 지원을 일부 받고 있다. 구글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는 매년 디지털 기기를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강사 교육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아스카에 도움을 준다. 호주 우체국은 이곳의 신문, 방송 등 매체 홍보비를 일정 부분 지원한다.

아스카 내에서의 업무 대부분이 자원봉사자들의 ‘선의’에 기대고 있지만 아스카의 시스템은 놀랄 정도로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교육생뿐만 아니라 강사의 지속적인 학습을 위해 현재까지 149개의 교육 매뉴얼을 만들었다. 정기적으로 각 지역 클럽별 업무 보고가 이뤄지고 각 클럽 대표들이 화상으로 정기 이사회를 진행한다. 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의 클럽도 활발히 소통된다는 얘기다. 기자가 트램셰드 아트 앤드 커뮤니티센터를 찾은 날은 이곳 강사들의 전체 회의가 열린 날이었다. “이번 달 저희 수업 학생 수는 변동이 없어요.” “우리 가상사설망(VPN)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곳의 시니어 강사 30여 명이 빙 둘러앉아 회원 현황, 클럽 행사 등 각종 안건을 두고 한 시간가량 진지한 논의를 했다.

아스카 지도부는 노인들이 직접 커리큘럼을 짜고, 자원봉사에 참여한 덕분에 단체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아스카 맨리 지부의 클럽 대표인 주디 엘리아스 씨는 “자원봉사 강사로 꾸려 나가기 때문에 가르치려는 열망이 남다르다는 게 우리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아스카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호주의 몇몇 중학교와 협력하는 세대통합 프로젝트를 지난달 말 시작했다. 호주 정부의 시니어 디지털교육 전담기관인 비 커넥티드(Be Connected)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10대 20명이 10주간 아스카 회원들을 교육하는 방식이다. 창립 때부터 쭉 함께해 온 엘리아스 씨는 “시니어들끼리만 꾸려왔던 아스카로서는 크나큰 도전”이라면서 “새로운 도약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드니·나라빈=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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