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괴물로 돌아온 ‘예쁜 쓰레기’

부천=김민 기자

입력 2019-08-06 03:00 수정 2019-08-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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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찬 개인전 ‘표준모형’
전시장 탈바꿈 廢쓰레기 소각장에 비닐봉지 이어붙인 거대한 형상
자본의 에너지인 상품의 해체 상징


형형색색의 촉수를 드리운 괴물, 이병찬(32)의 작품 ‘크리처’가 움직인다. 현란한 빛과 거대한 크기가 눈길을 끌지만, 가까이서 보면 라이터로 지져 이어 붙인 비닐봉지다. 손으로 쥐면 꺼져버리는 덧없는 형상. 소비 그 자체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 현대인의 기이한 모습을 대변하는 ‘예쁜 쓰레기’가 기괴한 형태의 괴물이 돼 돌아온 것만 같다.

이 작가의 개인전 ‘표준모형’이 10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는 곳은 경기 부천시 ‘부천아트벙커 B39’. 1992년 지어진 쓰레기소각장을 개조했다. 부천 중동 신도시 건설로 하루 쓰레기 200t을 처리하다 다이옥신 파동이 일어나고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2010년 폐쇄됐다. 버려진 공간은 지난해 6월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작품이 설치된 벙커는 깊이 39m의 사각형 공간으로, 쓰레기를 던지는 깊은 구덩이였다. 작가는 이곳을 “자본의 결과물인 상품이 쓰레기로 한데 모여 해체되는 공간”이라고 봤다. 크레인이 있던 곳에는 ‘크리처’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바닥에는 파이프 비계(건물을 지을 때 근로자들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도록 설치하는 가설물)와 흰 커튼으로 만든 설치 작품 ‘사라진 양말’이 자리한다.

소각장 전시를 제안 받은 그는 처음에 죽음을 다룰까도 생각했다. 그는 “작업은 물론 생활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하기에 내가 ‘고독사’할 거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표현하기엔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자본과 질량과 시간을 이야기했다.

‘사라진 양말’은 작업실에서 빨래를 널 때마다, 불쾌하게도 ‘한 짝씩’ 사라지는 양말을 보며 빠져든 공상에서 출발했다. ‘싸구려라서 그 가격만큼 시공간을 사용하고 소멸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왜곡된 시간에서는 양말이 거대 질량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작품은 양말의 질량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공간 한쪽에 놓인 스피커에서 메트로놈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린다. 휘날리는 흰 커튼이 불안을 고조시키고, 쨍한 음색의 금관악기 소리가 엇갈린다. 다른 흐름들이 순간 일치되며 고조되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가짜와 진짜가 혼재된 정보가 쏟아지고, 그 가운데 이리저리 쏠리는 자본의 흐름, 주식 시장이나 비트코인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이 작가는 자본주의 도시 속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추적한 작업으로 최근 주목을 받았다. 신도시 개발 광풍이 부는 가운데 학교를 다닌 경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온 세대의 감정을 표현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끊임없이 만졌던 비닐봉지를 소재로 만든 ‘크리처’는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도 소개됐다.
 
부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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