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평원 17년치 감정서 9000여점 처리 놓고 세갈래 기싸움

김민 기자

입력 2019-07-06 03:00:00 수정 2019-07-06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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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미술계 감정평가 주도권 갈등 확산

“감정서 자료 폐기는 ‘증거 인멸’, ‘분서갱유’?”

최근 미술시장에서 작품의 진위를 판결하는 ‘감정 평가’의 주도권을 두고 잡음이 일고 있다. 국내 최대 민간 감정기구였던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감평원)이 지난해 9월 문을 닫고 올해 청산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갈등의 발단은 2003년부터 2019년 3월까지 감평원이 발행한 ‘감정서’ 9000여 점의 행방을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시작됐다. 감정을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 왜 일어난 것일까?



○ 감평원 빈자리 둘러싼 감정 주도권 3파전


감평원은 2002년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로 출발해 2003년 출범한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감정협회)와 제휴를 맺고 미술품 감정 업무를 시작했다. 한국화랑협회는 1982년부터 자체 감정 업무를 해오다가 2007년 주식회사로 전환한 감평원과 제휴를 맺고 공동 명의로 감정서를 발급했다. 사실상 감평원으로 감정 업무가 일원화된 셈이다.

지난해 9월 감평원은 주주총회를 열고 해산을 결정했다. 영리 목적의 주식회사가 감정을 한다는 지적에 사단법인으로 재구성하거나, 감정협회와 업무를 일원화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올해 3월 감평원의 1, 2대 주주가 새로운 주식회사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감정센터·대표 정준모 이호숙)를 설립하면서 감정협회 ‘잔류파’ 주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불씨를 지핀 것은 청산 진행 과정에서 그간 감평원이 발급한 9296건의 감정서를 폐기하겠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한국화랑협회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감정서 폐기는 ‘먹튀’”라며 ‘강력 대처’ 방침을 밝혔다. 그러면서 화랑협회도 “자체 감정을 올해 8월부터 실시하겠다”고 해 감정을 둘러싸고 ‘3파전’이 벌어졌다.

감평원은 한국화랑협회도 2007년 이전의 감정 자료를 공유하지 않았으며 감평원의 데이터는 정기적으로 송부했는데도 뒤늦게 전체를 달라며 문제를 삼는다는 입장이다. 감평원 청산인인 임명석 우림화랑 대표는 “감정데이터를 두고 의견이 오가다 ‘이럴 바엔 폐기하자’는 말이 나온 것을 화랑협회에서 과장했다. 자료 폐기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웅철 한국화랑협회장은 “향후 감정에 활용할 수 있는 기존 감정서를 폐기한다는 것은 화랑협회의 자체 감정 업무를 못마땅하게 여겨 공유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종이 조각과 ‘명품’ 운명 가르는 감정


“붓이 칼이 되고, 혀가 칼이 되고, 돈이 칼이 되고… 그게 이 바닥 아닙니까?”

조선시대 명화의 위작을 둘러싼 사기극을 다룬 영화 ‘인사동 스캔들’(2009년)에 등장하는 대사다. 감정은 그 결과에 따라 작품을 ‘명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가치 없는 종잇조각으로 만들기도 한다. 특히 위작이 많았던 한국화나 근대미술에서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위작 제작 방법 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원화와 뒤에 붙인 배접을 떼어내는 복원 기술을 악용한 수법, ‘떼어내기’다. 동양화에서 주로 활용되는 이 수법은 쉽게 말해 작품을 두 장으로 가르고, 희미한 부분을 덧칠해 위조하는 방식이다. 1960, 70년대에 이 같은 위작이 다량 생산돼 일본으로까지 밀반출되곤 했다. 또 일제강점기 한국에 온 일본인이나, 재일 한국인 그림 중 서명이 없는 그림을 유명 화가의 전칭작(傳稱作)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도 위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7년 서울중앙지법이 위작 판결을 내린 이우환의 작품을 위조한 일당은 수개월에 걸친 연구 끝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원작 특유의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유리나 외국산 석채를 물감에 섞어가며 실험을 했다. 점을 일렬로 그리기 위해 ‘레이저수평기’를 동원하는가 하면, 서명은 사진 촬영 후 빔프로젝터로 캔버스에 쏜 뒤 그대로 따라 그렸다. 원작의 캔버스 틀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일련번호를 포토샵으로 조작해 비슷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오래된 그림처럼 보이게 하려고 캔버스 뒤에 커피색 물감을 칠했다.

그러나 이러한 범행은 결국 전문가의 눈에 덜미가 잡혔다. 오래된 시리즈의 신작이 갑자기 화랑가에 등장하고, 물감에 노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의심을 샀다. 결정적으로 이들이 작가 고유의 물감 배합 비율을 100% 재현할 수는 없었기에, 수사 과정에서 정밀 분석을 통해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05년 개인 소장가가 이중섭(1916∼1956), 박수근 화백(1914∼1965)의 미공개작이라고 주장한 2827점이 위작으로 밝혀진 사례는 한국 미술사상 최대의 사기 사건으로 꼽힌다. 이들 작품 역시 안목 감정과 물감 성분 분석을 통해 위작 판정이 내려졌다. 또 2007년 12월에는 당시 국내 경매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 원에 낙찰된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위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미술시장이 침체기에 들어서기도 했다. ‘빨래터’는 2009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진작으로 추정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위작 의혹을 제기한 미술전문잡지 ‘아트레이드’ 측도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한편 생존 작가의 경우 작가와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유통 과정이 비교적 투명해 위작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 번 위작이 수면에 드러나면 다른 작품까지 의심을 받게 돼 작가나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감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 컬렉터도 스스로 감식안 키워야

한편 전문 수집가들은 감정에만 기대기보다 구매자 스스로도 감식안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예술 작품의 가치는 기존의 경제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무 자르듯 객관적으로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집가들이 안목을 기르고, 좋은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고 알아보는 풍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감정도 더 엄격해지고, 위작이 설 자리도 줄어든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한국 근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소장가 A 씨는 “그림의 출처와 사료 등 다양한 참고자료로 진품임이 명백한 작품은 감정이 필요 없다”며 “진위가 애매한 C급, D급의 작품이 감정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작품은 구매자도 스스로 리스크를 알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위작의 문제는 작품 자체보다 이름값만 중시했던 미술시장의 풍토가 자초한 사태라는 의견도 나왔다. 즉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그림의 내용이나 역사적 의미에 따라 가치가 다르지만, 국내에선 이런 차이가 반영되지 않아 위작이 무분별하게 양산됐다는 것이다.

세계적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1881∼1973)만 해도 작품의 내용과 매체에 따라 수천만 원에서 수천억 원까지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일부 국내 미술시장에서는 최근까지도 그림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크기에 따라 ‘호당 가격’을 매기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같은 이중섭의 작품이라고 다 비싼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의 갭이 커진다면 위조를 통해 큰돈을 챙기는 일도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거래 당사자가 아닌 제3의 기구를 통해 감정을 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가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예술 작품 딜러 B 씨는 “과거의 한 유력 수집가는 고미술품을 구매했다가 위조품이라는 걸 알게 되자 그 자리에서 깨버렸다고 한다”며 “이는 결국 수집가로서 속은 자신의 감식안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불확실한 행운을 노리고 투명하지 않은 유통 경로로 싼값에 작품을 살 때는 구매자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카탈로그 레조네, 블록체인… 감정의 미래는?

통상적인 미술품 거래에서 감정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 대다수 수집가들은 출처가 확실한 작품을 구매하며, 동시대 작가는 감정이 필요한 경우가 거의 없다. 최웅철 회장 또한 “수십 년 동안의 감정을 통해 ‘진위 감정’을 해야 하는 작품은 상당수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대신 국공립기관이나 개인 단체가 자산을 기록하기 위해서 기존에 소장했던 작품의 현재 가치를 산정하는 ‘시가 감정’의 비중이 더 높아지고 있다.

새롭게 난립하는 감정기구들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시가 감정’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 가격의 변동 역시 일정한 기준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역사적, 미학적, 조형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감평원이 기존에 갖고 있던 감정서가 중요한 이유도 이 자료를 기반으로 ‘시가 감정’의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거래되는 작품에 관한 기록을 블록체인에 저장해 작품을 보증하는 기술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블록체인 특성상 작품 관련 기록을 특정 주체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동시에 기록을 보유하고 이를 영구적으로 보관하는 형태가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 새로운 객관적 작품 보증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공신력 있는 미술품 감정기구의 필요성에 관한 지적 때문에 국가가 특정 기관을 감정 주체로 지정하도록 하는 법안도 발의된 상태다. 정부는 2017년 위작 미술품 유통과 허위 감정 등 시장질서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미술품 유통법’안을 만들어 발의했다. 올해 2월에는 김영주 의원이 같은 내용을 담은 ‘미술품의 유통 및 감정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두 법안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다만 국가가 지정한 기관이 작품을 보증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사실상 인력풀이 넓지 않은 미술계에서 그동안 감정 업무를 맡았던 인력이 그대로 국가 인증만 받게 되는 격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보다는 새로운 감정 기술과 인력을 육성하고, 작가 측의 ‘카탈로그 레조네’(작품 전체를 기록한 도록) 제작을 독려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욱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현대 미술작품엔 ‘진위감정’보다 ‘시가감정’ 비중 더 높아져 ▼

佛 아트프라이스닷컴 등 작가-경매 빅데이터 실시간 공유

미술품 감정은 예술 작품의 진위를 가리고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를 말한다. 위작 여부를 판단하는 ‘진위 감정(authentication)’과 작품의 가격을 산정하는 ‘시가 감정(appraisal)’으로 나눈다. 또 미술사가, 평론가, 큐레이터 등이 작품의 가격뿐 아니라 미학적, 시대적, 조형적 가치를 판단하는 것을 ‘가치 감정’, ‘가치 평가’라고도 한다.

흔히 감정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진위 감정은 작품에 사용된 재료의 성분을 분석하는 등 객관적 데이터를 활용하는 ‘과학 감정’과 여러 작품을 오랜 시간 보면서 감식안을 키운 전문가가 ‘안목 감정’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진위 감정 결과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극단적으로 갈리기에 많은 주목을 받는다. 과거에는 안목 감정이 주를 이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과학 감정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현대나 동시대 미술 작품에 관해서는 시가 감정의 비중이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한국 미술시장에서는 감정의 중심을 작품 자체의 미학적, 조형적, 역사적 가치보다는 작가의 학력, 인맥, 수상 경력 혹은 캔버스 크기 등 외적 기준에 둬 불신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작품 가격이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닌 해당 작가의 작고 같은 외적 상황에 휘둘리면서 수집가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프랑스에 본부를 둔 아트프라이스닷컴, 미국 뉴욕과 독일 베를린 기반의 아트넷이 경매나 작가에 관한 빅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해 작품 가격을 책정하는 데 참고하고 있다. 각국의 오랜 역사를 지닌 민간 감정 회사도 시가 감정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대적으로 미술품 거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는 잘못된 작품 가격 산정 기준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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