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는 “이것도 갑질?” 직원은 “이러니 갑질”… 머리아픈 기업들

김현수 기자 , 강승현 기자 , 김호경 기자

입력 2019-07-05 03:00 수정 2019-07-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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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교육 비상


“그날이 오고 있다.”

최근 금융계 A기업 블라인드에는 16일을 기다린다는 글이 속속 올라왔다. 한 작성자는 특정 상사를 지적하며 “그간 느꼈던 설움을 더 이상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다른 기업 게시판에는 상사로부터 ‘갑질’을 당했을 때 어떻게 신고해야 하는지 방법을 묻는 이들이 많았다. 16일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는 첫날이다.

4일 산업계에 따르면 주요 기업 인사팀과 법무팀 등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담은 취업규칙을 만들고 교육에 나서느라 비상이 걸렸다. 어떤 행동이 직장 내 괴롭힘이고, 어길 경우 어떤 징계를 담을 수 있을지 노조와 합의해 16일 이전에 취업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과태료 500만 원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취업규칙 변경 절차를 끝냈고 지난달 전사 교육을 실시했다. 현대자동차도 준법지원팀에서 전 직원에게 ‘꼭 알아야 할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란 내용의 e메일을 보내는 등 준비에 나섰다. 현대차 관계자는 “노조와 협의해 취업규칙 문구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주요 기업은 괴롭힘 금지법의 취지는 환영하지만 자칫 과잉 처벌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괴롭힘의 정의가 애매해 ‘갑질 인지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 “갑질문화 근절 환영 vs 정의 애매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지난해 간호사 ‘태움’ 사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사내 폭력사태 등으로 직장 갑질 근절에 대한 여론이 거세지자 올 초 근로기준법에 관련 조항을 넣은 것이다.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이다.

이 법으로 가해자를 직접 처벌할 수는 없지만 회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회사의 관리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다. 만약 회사가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한다면 대표이사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기업들이 앞다퉈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교육에 나서는 이유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하반기 전사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임원을 포함한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따로 진행하고 자체 온라인 인사포털시스템 내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할 수 있는 ‘접수처’를 만들 계획이다.

기업들은 ‘일단 무조건 조심하자’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법 시행 초기인 만큼 팀장급들은 ‘첫 타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몸을 사리고 있다. 사원 대리급 직원들은 신고 방법을 공유하는 중이다. 한 대리급 직원은 “만일을 대비해 일단 녹음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괴롭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데다 자칫 상사의 모든 언행이 문제 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있어 당분간 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사례집에는 상사가 술에 취해 밤에 카톡을 보내고 답변을 강요하거나 자신과 술을 마시자고 윽박지르는 것 등을 괴롭힘 사례에 포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업무를 위한 강요는 괴롭힘이 아니라고 했지만 상황이 애매할 수 있다.

한 대기업 팀장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괴롭힘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서 “상사 입장에선 교육 차원에서 훈계한 것인데 괴롭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 “인사팀 걸핏하면 조사할까”

일부 기업 인사팀은 벌써부터 블라인드나 회사 익명 게시판 등에 특정 간부 사원의 ‘갑질’이 오르면 강력 대응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B기업은 얼마 전 블라인드에 한 팀장에 대한 불만의 글이 올랐고, 댓글이 수십 개 달리자 인사팀이 직접 해당 팀장에 대한 조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불만 내용은 주로 “자기가 잘나간다고 자랑하고, 일을 남에게 미룬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자랑하면 듣기야 싫겠지만 괴롭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팀장급 이상 임직원들은 인사팀이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보다 사내 ‘갑질’ 피해가 큰 중소기업에는 개선 효과가 정작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교육 인력이나 인프라가 열악한 중소기업들은 법 시행이 코앞이지만 자체적으로 대비하기 쉽지 않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회사에 법 시행 관련 안내문을 뿌리긴 했지만 아직 취업규칙을 개정할 계획조차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강승현·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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