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나면 ‘사이코패스’ 돼” 당신의 공감 능력은 안녕하신가요

동아일보

입력 2019-06-07 22:03 수정 2019-06-0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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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스 드발은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영장류연구를 수행한 동물학자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 ‘침팬지 폴리틱스’가 가장 유명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공감의 시대’와 ‘착한 인류’다. 공감과 공존의 철학을 담은 이들 책을 통해 그는 ‘생존경쟁만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기존의 편견을 조목조목 논파한다. 우리가 가진 공감 능력 역시 진화과정에서 뿌리를 내린 동물적 본질이라는 점과 그것이 어떻게 종의 공존으로 연결되었는가에 대해, 영장류의 사례를 통해 자분자분 들려준다.

어느 한가한 동물원의 아침을 상상해보자. 동물학자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연구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다. 그 순간, 한 무리의 침팬지들이 창문 아래를 지나간다. 어딘가를 향해 일제히, 빠르고 조용한 동작으로. 동네 주민들이 도착한 곳에는 ‘메이’라는 만삭의 침팬지가 서 있었다. 몸을 약간 굽혀서 다리를 벌리고, 오목하게 구부린 손을 가랑이 사이에 받친 채로. 그 옆에는 출산경험이 있는 애틀란타라는 침팬지가 같은 자세로 서 있다. 초산인 메이에게 산파 노릇이라도 하는 것처럼.

10여 분 후, 마침내 아기가 메이의 손에 내려와 놓인다. 동네 주민들은 흥분해서 부둥켜안고 날뛰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갓난쟁이를 보고 싶어 서로 밀쳐대며 안달복달한다. 메이는 제 둥지로 가서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물린다. 애틀랜타는 이후로도 몇 주 동안 메이의 털을 정성껏 골라 준다.

드발의 기술에 따르면, 포유류는 파충류가 주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인간에게 준다. 어떤 것은 지성(대뇌피질)보다 훨씬 깊은 곳을 파고들었을 때 나타나는 감정적 반응이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행위, 비합리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는 이 반응의 이름은 ‘공감’이다. 이른 아침, 침팬지 동네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은 바로 공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공감은 ‘나와 같다’고 느끼는 감정이자 ‘타자를 향한 통로’다. 포유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진화의 유산으로, 영장류의 공감 능력은 여타 포유류들을 압도할 만큼 뛰어나다고 한다. 다수(동네 주민 수준을 넘어서는)가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인 인간은 그중 가장 크고 깊은 공감 능력을 가졌다.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면 “중요한 일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던 하찮은 존재”인 인류를 지구상 최고의 포식자로 출세시킨 재능이다.

이 특별한 재능과 생물학적 관련이 있는 것이 VEN(Von Economo Neurons)이라는 긴 방추형 세포다. 호미노이드(유인원과 인간)와 고래, 코끼리에게만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가 ‘인간적’이라 여기는 특성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많다. 따라서 여기에 손상을 입으면 관점 바꾸기, 공감, 포용력이 이해 지향성 등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곤 하는 사이코패스는 이 부분에 문제가 있는 부류다. 공감 능력 중 인지기능은 멀쩡하나 ‘관점 바꾸기’ 부분이 고장 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는 능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공유하지 못한다. 그들이 누군가의 삶을 거리낌 없이 파괴해버리는 게 가능한 이유다. 자기 행위를 반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그런 의미에서 보통사람들은 그들을 ‘인간’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건 공감이다. 바쁜 출퇴근 시간에 119구급차를 위해 기꺼이 도로 중앙을 비워주는 집단 행위나 유람선 난파사고에 국내 잠수팀이 헝가리까지 날아가 실종자 수색을 돕는 일 등은 공감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흔히 이타적 행동이라 부르는 이 희생 행위는 공존의 토양이 되는 인간 특유의 도덕성이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 해도, 그 천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얻을 게 없다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 우리는 경쟁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사피엔스는 사이코패스의 동의어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인류는 서로 먹고 먹히며 필연적 멸종을 맞았을 테다. 인간의 생존 동력이 자기애가 아닌 타인의 행복인 이유다. 살아왔고, 살아있으며, 살아가려면 우선, 우리의 공감 능력이 안녕해야 한다. 그러니 종종 살펴보자. 불운한 처지에 놓인 누군가를 향해, 혹시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알 게 뭐야. 내 일도 아닌데.

정유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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