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인사이트]美-中 5G 패권싸움 사이에 낀 한국, ICT 정책리더십부터 세워야

신동진 기자

입력 2019-06-03 03:00:00 수정 2019-06-03 05: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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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發 ‘디지털 철의 장막’




신동진 산업1부 기자
2014년 6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한국 법인 사무실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중구 남대문 옆으로 옮기자 국내 통신업계에선 말이 많았다. 이 자리는 바로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 터다. 무섭게 성장하면서 한국 통신시장까지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는 화웨이의 ‘기술굴기’에 국내 통신업체들의 불안감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화웨이는 지난주 이곳에 조용히 세계 첫 ‘5세대(5G) 이동통신 오픈랩’을 개소했다. 미국 정부의 거래 제한 조치로 경색된 분위기 탓에 당초 계획한 미디어 초청도 취소하고 비공개로 진행했다. 국내 협력사들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화웨이 스스로 행사를 축소하지 않았더라면 참석 여부를 두고 기관과 기업들 사이에 눈치 싸움이 치열했을 것이다.

지난달 16일 미국의 화웨이 제재 발표 이후 구글 퀄컴 인텔 등 미국 정보기술(IT) 공룡들이 잇달아 화웨이 측에 부품 공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과 이동통신업체 보다폰, 일본 KDDI와 소프트뱅크 등 미국의 우방 진영 업체들도 화웨이 봉쇄 작전에 가담하면서 화웨이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수출 비중이 큰 무역국가로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5G 패권 싸움이 시작된 지금 미중 고래 싸움에 낀 새우처럼 ‘IT 강소국’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17년간 국내 전력, 철도, 금융, 통신망에 침투한 화웨이

국내 소비자들에게 화웨이의 존재감은 크지 않을 수 있다. 매출의 60% 정도를 기업 간 거래(B2B)에서 얻기 때문이다. 1987년 중국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인 런정페이 회장이 전화교환기 수입 업체로 시작한 화웨이는 기술 장벽이 높은 통신장비 분야에서 매년 매출의 10%를 연구개발(R&D)에 쏟아부으며 1998년부터 해외 시장을 공략했다. 각종 기간망 수주전에서 시스코 등 경쟁업체들보다 25∼50% 싼 입찰 가격을 써내 점유율을 높였다.

한국에는 2002년 처음 진출해 2004년 KT 광전송장비를 시작으로 2007년 한국전력 전력통신망, 2008년에는 LG유플러스의 전신인 LG데이콤과 LG파워콤의 인터넷TV(IPTV) 전국망 구축에 장비를 공급했다. 2010년대 들어 KT와 함께 신협, 신한은행 등 금융망까지 영역을 넓혀 지난해 말 1200억 원 규모의 농협 전국망 고도화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울 지하철 1∼4호선과 7, 8호선에도 화웨이 장비가 도입됐다. 현재 국내 곳곳에 구축돼 있는 내부 유선망의 3분의 1이 화웨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통신사 중에서는 KT와 LG유플러스가 기간망에 화웨이 제품을 쓰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화웨이는 경쟁업체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을 내세우지만 장비 유지비로 상당액을 청구해 결국 비슷한 가격이라는 평가가 많다”면서 “오히려 가장 큰 경쟁력은 신기술이 나왔을 때 기업 현장에 맞게 재빨리 상용화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화웨이는 롱텀에볼루션(LTE)부터 최다 특허(15%) 등 기술력을 앞세워 무선 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하지만 대규모 5G 장비 수주전을 앞두고 서방의 보안 우려로 발목을 잡혔다.

미국에선 2012년 하원이 화웨이와 ZTE 등 중국 통신장비업체들을 잠재적인 스파이로 규정하며 안보 위협 요소로 거론한 이후 반(反)화웨이 움직임이 거세졌다. 미 하원 정보위원회 조사 결과 화웨이가 중국군 사이버전쟁 부대에 특수 네트워크 서비스를 제공한 사실이 확인된 것. 이듬해 10월 LG유플러스가 LTE 망에 화웨이 장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자 미국 유력 정치인들이 한미 동맹관계에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 5G 장비 등 반짝 어부지리, 독자 OS는 위협 요소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가 강화되면서 국내 IT 업체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먼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2위 화웨이에 거센 추격을 받던 삼성전자는 한숨을 돌리게 됐다. 이번 제재로 스마트폰 뇌관인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운영체제(OS), 반도체 등 부품 수급이 난항을 겪으면서 화웨이 점유율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통신장비 분야에서도 화웨이를 대체할 수 있는 삼성전자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난해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점유율은 화웨이(31%) 에릭슨(27%) 노키아(22%) ZTE(11%) 순이다. 삼성은 5%대 점유율을 5G를 계기로 2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화웨이에 스마트폰 부품을 납품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메모리)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디스플레이) LG이노텍(카메라모듈) 등은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화웨이가 지난해 국내 기업들로부터 구매한 총액은 약 106억 달러(약 12조6000억 원) 규모로, 대중국 수출액(1011억 달러)의 10.5%에 달한다. 국내 업체들은 화웨이 납품 물량은 일부 감소하겠지만 그 대신 경쟁 고객사의 점유율이 증가해 큰 타격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구글 애플 등 미국 스마트폰 OS에 종속된 화웨이가 기술 자강 차원에서 자체 OS 생태계를 구축할 경우 장기적으로 국내 기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스마트폰뿐 아니라 TV, 자율주행차 등 모든 기기가 연결되고 이 연결이 점차 확산되는 5G 시대에 화웨이가 OS 독립을 이룰 경우 안드로이드 OS에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에는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단기간에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더 우세하다.

미국 정부가 화웨이 외에 하이크비전, 다화(다후아) 같은 세계 1, 2위 영상보안업체들로 제재 대상을 확대할 경우 국가 대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미중 기술 전쟁으로 확전될 수도 있다. 이에 더해 중국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까지 불이익을 주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시행하면 앞으로 진영 간 기술 협력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 정책 리더십 부재 속 선택의 기로에 내몰리는 한국


이른바 ‘디지털 철의 장막’의 전조는 이미 시작됐다. 진영 논리에서 자유롭던 학계에서조차 화웨이 보이콧이 일어난 것. 160여 개국 42만여 명의 회원을 둔 세계 최대 기술 학회인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는 미국의 제재가 풀릴 때까지 화웨이 소속 과학자들을 논문 심사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글로벌 무선 기술 표준을 정하는 와이파이협회와 블루투스협회, SD협회 역시 미국의 조치 이후 화웨이 참여를 잠시 배제하기도 했다. 강충구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안드로이드 같은 오픈소스가 무기로 바뀔 수 있다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 현실이 됐다”며 “미소 냉전 이후 국제 협력으로 이뤄졌던 개방적인 기술 개발 풍조가 진영 간 기술 대립으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미중이 기술을 무기 삼아 대립하는 상황은 두 강대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국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를 남겼다. 언제든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 OS, 클라우드 등에 대해 자체 솔루션 확보를 우선순위에 두는 계기가 돼야 한다. 공공기관 장비 도입에 국산 제품을 장려해 안보는 물론이고 국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마중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종된 정보통신기술(ICT) 정책 리더십 복원이 먼저다. 현재 대통령산업정책비서관실에서 ICT 산업을 챙기지만 주 업무가 아니고, 과학기술보좌관실은 ICT보다는 연구개발(R&D) 정책에 주력하고 있다.

지정학적 안보 요충지인 한국에서 기간망이나 정부 장비를 도입할 때 오로지 가격 입찰만 우위에 두는 행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정부과천청사와 일부 원자력발전소에는 미국이 보안을 이유로 금지한 중국산 폐쇄회로(CC)TV를 쓰고 있다. 화웨이 장비를 쓰는 공기업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지침이나 방향이 나오기 전까지는 (미중) 양쪽을 자극하지 않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중 기술 전쟁 속 ICT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타격을 받을 건 1차적으론 산업이지만 그 다음은 국민이다.

신동진 산업1부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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