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 성장력 찾는 것이 제조 혁신의 지름길”

동아일보

입력 2019-05-27 03:00 수정 2019-05-2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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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유정열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실장

유정열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실장
라인강의 기적으로 산업화에 성공한 독일은 80년대 위기상황에 빠졌다. 미국은 아폴로 계획의 성공 이후 우주항공 등으로 산업의 지평을 넓혔고, 일본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서 약진하면서 독일경제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워라.” 1983년 독일의 한 경제지는 이러한 독일경제 상황을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고 비유했다. 독일이 방심했다는 반성과 함께 먼 곳에서 해법을 찾기보다는 독일 내부에 잠자고 있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잠재 성장력을 찾아내야 한다는 제언이었다.

이후 독일은 자국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 잠재 성장력을 활용하는 경제정책을 펼쳤다. 금융 등 서비스업 보다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기술과 경험이 축적된 전통 제조업에 집중했다. 독일 남부 수공업 겸업 자영농에서 발전한 가족경영 중소기업인 미텔슈탄트를 혁신주체로 키웠다. 중세 길드의 마이스터와 도제식 교육을 현대 직업훈련에 접목해서 우수한 인력을 배출했다.

독일의 전략은 적중했다. 명품식기 ‘헨켈’, 프리미엄 가전 ‘빈터할터’, 자동차부품 명가 ‘보쉬’ 등 제조업 전반에 걸쳐 히든 챔피언들을 키워냈다. 높은 실업률과 낮은 성장률로 한때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독일은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견실한 성장을 기록하며 세계경제의 우등생이 되었다. 선진국들도 제조업 부활을 추진하면서 독일 배우기에 나섰다.

30여 년 전 독일과 우리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경제가 선진국의 견제와 신흥국의 추격을 극복하려면 내부의 잠재 성장력을 찾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주력 제조업을 만들어낸 제조현장의 숙련인력,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철강, 화학 등 업종별로 효율적으로 집적된 산업단지 클러스터, 광범위한 업종에 포진한 중소기업 생태계와 어떠한 품목도 공급할 수 있는 서플라이체인의 완결성, 외환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된 세계최고 수준의 ICT인프라,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며 세계인을 놀라게 한 대중문화 역량까지 우리나라에는 유무형의 자산들이 많다.

그동안 산업통상자원부도 제조업 분야에서 이러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지난달 발표한 시스템반도체 전략이 그러하다. 자동차, 휴대전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수요산업을 아직 초기단계인 시스템반도체 육성의 마중물로 활용하고,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른 경험을 파운드리 분야에 접목하여 단기간에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연초에 발표한 수소경제 로드맵에도 우리의 강점을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 최초의 수소차 상용화 경험, 수소생산을 뒷받침하는 석유화학 산업 등 축적된 역량을 활용하고, 충전인프라 등 아직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는 대책을 제시했다.

혁신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축적의 길이다. 혼자서는 갈 수 없고 함께 같이 가야 한다. 혁신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길의 연장선상에서, 각자의 삶의 현장과 주변에 숨어있는 잠재 성장력을 찾아내어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제조혁신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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