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식시장 좁아… 해외 부동산 등 투자의 눈 넓혀야”

윤영호 기자

입력 2019-05-08 03:00 수정 2019-05-08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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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채 출신 31년만에 대표에… 한국투자증권 정일문 사장

한국투자증권 정일문 사장과 인터뷰 후 서울 여의도 증권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자사 휴식 공간 늘푸른공원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1988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공채 1기로 입사한 그는 동기 중 가장 늦게 대리로 승진했지만 차장 승진 때부터는 선두를 달려 마침내 공채 출신 첫 대표이사가 됐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일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한국투자증권 정일문 사장(55)은 공채로 입사해 사장까지 오게 된 ‘비결’을 묻자 “무엇보다 하는 일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1월 2일 취임한 정 사장은 이 회사 첫 공채 출신 대표이사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본사 집무실에서 정 사장을 만나 31년 증권맨 인생에 대해 들었다.

정 사장은 NH농협증권 정영채 사장 등과 함께 국내 투자은행(IB) 시장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한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벤처 1세대’ 정문술 전 회장이 창업한 미래산업㈜ 등을 발굴해 상장시켰다. LG디스플레이, 삼성생명, 삼성카드 등 대기업 상장도 그가 관여했다. 대기업 계열사들과 IB거래를 하지 못했던 한국투자증권은 2005년 그가 IB본부장을 맡은 이후에야 거래를 틀 수 있었다.

국내 자본시장 발전에 기여해 왔다는 것이 정 사장의 자부심. 그는 “기업들의 건전한 산업자본 조달에 필요한 기업공개(IPO)나 증자, 회사채 발행 등을 돕는 게 IB 업무인 만큼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과거 은행 차입금에 의존하던 국내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에야 IB 영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보람도 많았다. 특히 1990년대 후반 그의 설명을 듣고 우리사주를 배정받아 후일 차익을 실현했던 충남 천안의 한 회사 근로자는 잊을 수 없다. 차익으로 아파트를 넓혔던 근로자가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새 아파트 집들이에 초대했다. 그는 “진공청소기를 선물로 준비해서 천안까지 내려갔다”며 “IB 업무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저런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은 롯데푸드에 합병된 파스퇴르유업이 1980년대 후반 국내 처음으로 출시한 저온 살균 우유로 인기몰이를 했을 때의 일이다. 정 사장은 1990년대 초반 파스퇴르유업 최고경영자 사무실을 찾아 사채 발행을 권했다. 그러자 대뜸 “은행돈도 쓰지 않는데 무슨 사채냐”는 호통이 되돌아왔다. 사채(社債)를 사채(私債)로 오해해 생긴 일이었다.

IB 담당자는 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CEO)와의 친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자금 등 해당 기업의 민감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나는 지방 출신(광주광역시)인 데다 명문대 졸업자도 아니어서 변변한 학맥도 없었다”면서 “무조건 회사로 찾아가다 경비에게 제지를 당한 일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겨 열심히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간 나무는 없었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맺은 인연은 그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가 주도해 만든 진우회(眞友會) 회원들이 대표적이다. 진우회는 IPO를 앞둔 회사 대표들의 모임으로, 진우는 한국투자증권의 심벌마크 ‘트루 프렌드(true friend)’에서 따왔다. 올해 19년째인 이 모임엔 지금까지 1년에 22∼25명씩 참여해 왔다. 총 회원은 350여 명. 그는 이 가운데 80개 사를 직접 상장시켰다. 그는 “이들 회원 사이에서 인수합병(M&A)도 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는 등 서로 윈윈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초 개인고객그룹장으로 발령 났을 때의 일이다. 리테일 영업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를 두고 회사 안팎에서는 ‘물을 먹은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리테일 영업의 중심을 주식 중개 영업에서 고객 자산관리로 옮기는 혁신에 나섰다. 주식 중개 수수료 인하 경쟁으로 수수료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그가 주목한 것은 해외 자산이었다. 그는 2017년 3월 미국 항공우주국(NASA) 본사 매입 자금 중 일부(900억 원)를 모집할 때 개인 투자자들에게 공모펀드 형태로 팔아 3분 만에 마감하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 최초의 해외 부동산공모펀드였다. 정 사장은 “한국 주식시장 비중이 전 세계의 2%도 안 되기 때문에 이제는 해외 자산으로 눈을 돌려야 하고 주식이나 채권 외에 부동산 같은 대체 자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 사장이 증권맨이 된 것은 운명이었다. 광주은행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그를 주총장에 데려가 주식에 눈을 뜨게 했다. 단국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당시 증권회사 임원이던 막내 이모부 집에서 기거했는데 나중에 그 이모부가 증권사 사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주변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증권회사를 선택했는데 이렇게 오래 다닐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 취임하자마자 실적 홈런… 별명이 ‘승리의 아이콘’ ▼


1분기 수익 역대 최대기록 예상… 올들어 IPO 13건 주간사 맡아

‘승리의 아이콘.’

2일로 취임 4개월을 맞은 한국투자증권 정일문 사장이 새로 얻은 별칭이다. 취임 직후부터 돋보이는 성과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이달 중순 공시 예정인 1분기(1∼3월) 실적은 분기 기준 최대 기록을 세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금까지 최고 기록은 지난해 1분기 때의 순이익 1513억 원이었다.

또 올해 들어 13건의 기업공개(IPO) 주간사회사에 선정됐다. 현대중공업 계열 신재생에너지 회사 현대중공업그린에너지, 2017년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 한국 자회사가 투자해 유명해진 미디어 커머스 기업 블랭크코퍼레이션 등 대어급이 포함됐다. 3월 28일엔 고용노동부가 관리하는 10조 원 규모의 고용보험기금 전담 자산운용기관으로 재선정되기도 했다.

정 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부서 간 본부 간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을 강조하고 있다. 그 자신이 리테일 영업을 총괄하면서 IB 부문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시너지를 직접 경험한 덕분이다. 그는 “IB 쪽에서 발굴한 자산을 리테일 부문이 고객들에게 파는 식으로 시너지가 일상화돼야 한다”면서 “그런 면에서 증권회사 리테일 영업은 결코 사양산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 차원에서 한국카카오은행과 추진한 카카오뱅크 주식연계계좌 서비스(뱅키스)도 대박을 터뜨렸다. 3월 25일 개시한 이 서비스는 2일 현재 계좌 수가 68만6000개에 달한다. 정 사장은 “지난 13년 동안 e비즈 사업을 하면서 확보한 계좌 수가 90만 개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라면서 “뱅키스 계좌 주인은 대부분 20∼30대인데, 이들을 위한 상품을 곧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직원들에 대한 배려에서도 섬세하다. 그는 취임 이후 회사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직원들을 위해 음식의 질을 높이도록 했다. 직원들이 차를 마시며 소통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도 마련했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것. 회사 로비의 회의실을 모두 철거해 열린 공간으로 만든 것도 비슷한 이유다. 로비 2층 벽면에는 각종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을 설치해 첨단 증권사, 1등 증권사 분위기를 연출할 예정이다.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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