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세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 “카리스마 목소리 덕에 지금도 수많은 러브콜”

김기윤기자

입력 2019-05-06 16:45 수정 2019-05-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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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진(消盡)이라는 말이 참 좋아요. 무대에서 한 점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내 모든 걸 소진하는 게 연극이거든요. 미처 저를 다 태우지 못한 날이면 스스로 얼마나 부끄럽던지…”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77)는 최근 낭독극 ‘꿈속에선 다정하였네’에서 ‘혜경궁 홍씨’로 변신했다. 3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만난 그는 “낭독극인 만큼 관객에 전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인물의 감성을 담아 나를 불태우듯 대사를 뱉어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앞둔 그는 “잠깐 무대 좀 보고 오겠다”며 손수 음향과 무대를 점검했다. 공연장 안팎을 분주하게 오가며 완벽을 추구했다.

“아무리 작은 극장이라도 관객에게 제 연기가 고루 전달되지 않으면 얼마나 속상한지 몰라요. 2층에 제 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어 음향을 점검하고 새 장비도 설치했죠.”

작품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인 혜경궁이 집필한 ‘한중록’을 재구성한 이야기다. 그의 기억을 따라 현실과 과거를 넘나들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대면한다. 배우이자 프로듀서 역할도 겸한 그는 “부부갈등, 남편과 아들의 갈등, 친정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 혜경궁에게 한(恨)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며 “후대에 그의 말을 전하고 싶어 직접 작가, 연출을 섭외했다”고 설명했다.

숱한 무대 경험에도 그는 긴장의 끝을 놓지 않았다. 책임감 때문에 “평생 했어도 무대는 점점 더 떨린다”고 했다. 그가 끊임없이 새 도전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연극을 안 하면 숨이 막히거든요. 6.25 전쟁 중인 9살 때부터 극을 접하기 시작했으니 연극은 이미 운명이자 공기처럼 제 안에 들어와 있어요. 그 말 말고는 설명이 안 되네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할머니 역할의 오디션에 도전해 캐스팅된 일화도 털어놨다.

“우리 때는 오디션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영국에서 온 연출가는 베테랑 배우더라도 오디션은 거쳐야한다고 했죠. 국내 제작진이 난감해할 때 제가 먼저 오디션을 보겠다 했어요. 제 나이라고 못할 게 뭐가 있나요.”

배우로서 노력과 도전을 강조하는 그도 타고난 목소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는 “어머니 목소리를 빼닮아 배우로서 큰 무기를 가졌다”고 말했다. 성우로 먼저 연기를 시작한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 덕택에 지금도 수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원작자도 제가 영어만 된다면 극 중 마녀 역할을 해주길 원했어요. 최근 봉준호 감독 요청에 영화 ‘기생충’ 소개 영상에도 제 목소리를 담았죠. 외모는 변해도 쉽게 변하지 않는 목소리 덕택에 배우로서 늘 감사하게 삽니다.”

인터뷰 내내 박정자는 앞으로의 도전에 대한 욕심도 내비쳤다. 혜경궁처럼 하고픈 말이 많은 명성황후의 ‘살풀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조상들의 원혼이 있다면 저를 내려다보며 고마워하겠죠. 새로운 배역으로 항상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제 인생이야말로 한바탕의 굿거리입니다.” 12일까지. 3만·4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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