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스며든 미소… 옛시간을 더듬다

서산=이설 기자

입력 2019-04-06 03:00 수정 2019-04-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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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충남 서산 ‘백제의 미소’|

이번 여행의 핵심은 ‘직관’(직접관람)이다. 백제를 대표하는 미소, 천하의 명당, 한국의 대표 사찰…. 한 번쯤 눈으로 만나야 할 명소들이 일정표에 빼곡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충남 서산 운산정류소. 택시로 10분을 더 달려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입구에 닿았다. 저 멀리 크게 팔을 흔들어 환대하는 스님들이 보인다. 내포문화사업단 공동대표 정범 스님과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이다.

합장을 나눈 뒤 짧은 계단을 오르자 목탁 소리가 산세를 울렸다. 가까이 가야산이 병풍을 둘러 아래위로 초록빛이 펼쳐진다. 유배지에 불시착한 듯 비현실적인 풍경 사이로 ‘백제의 미소’가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온화함과 엄숙함, 푸근함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품은 얼굴이다. “바위가 우산처럼 드리워져 비는 들이치지 않고 수분을 천천히 머금었어요. 자연의 과학 덕분에 1000 년 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됐죠.”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삼존상은 아침엔 햇살이 드리워 은은하고, 정오엔 음영이 두드러져 입체적이며, 저녁엔 그늘이 져 근엄하다. 각기 다른 시간에 여러 차례 다녀간 방문객이 불상이 훼손된 줄 알고 관리자에게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로 발걸음을 돌린다. 4대강 사업으로 깔린 눈부시게 하얀 인공바위가 눈에 거슬린다. ‘가든’이란 이름이 붙은 숙박업소 겸 식당과 논밭을 지나 20분쯤 걷자 탁 트인 벌판과 맞닥뜨린다. 10만2886m²(약 3만1100평)에 이르는 보원사지다.

절터 귀퉁이에 흙빛을 머금은 석돌 수백 개가 가지런히 누워 있다. 한때 위풍당당하게 사찰을 지탱했을 유적들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통일신라·고려시대에 꽤 번성했던 절로 짐작된다. 대웅전의 철조여래좌상은 현수막에 박제된 신세로 손님을 맞고 있다. 현재 좌상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덤불이 성성한 이곳은 한때 사람과 물자가 빈번히 드나들었다. 바다에서 이어진 강줄기는 가야산 곳곳을 파고들었고, 10여 개 마을이 군락을 이뤄 내포지구를 형성했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입니다. 중국에서 내륙으로 가려면 이곳 내포를 거쳐야 했죠.” 정범 스님의 설명이다.

절터 입구의 당간지주에서 오르막을 따라 걷다 보면 숲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길은 평탄하지만 산세는 보물급이다. 덕분에 절경을 감상하면서 난도가 낮은 트레킹을 할 수 있다. 발 아래로 계곡과 실개천이 드문드문 흐른다.

30여 분 이어진 길 끝자락에 천주교 성지가 있다. 과거 천주교 사제들이 바닷길을 따라 이곳에 다수 정착했고, 박해 때마다 지역 신자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불교와 천주교 양측에 의미가 깊은 장소인 셈이다.

야트막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언덕 중간쯤에서 만난 고즈넉한 정자. 주먹밥으로 요기를 한 뒤 다시 채비에 나선다. 그늘을 치고 앉을 공간이 중간중간 선물처럼 등장해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가면 좋다.

다음 행선지는 예산 가야사지(伽倻寺址). 영화 ‘명당’에서 하늘이 내린 명당으로 묘사된 그곳이다. 1시간 정도 느긋하게 걷다 보니 남다른 지기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적당한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인 반듯한 평지. 그 한가운데에 거북이 등딱지처럼 솟은 잘생긴 언덕이 자리한다. 그 위로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南延君 墓)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까지 묏자리를 몰래 파는 사람이 많아요.” 지나가는 어르신이 한마디 던진다. ‘불법 묘지 금지’라는 현수막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언덕을 바라보는 벤치에 오래 앉아 볕을 쪼이러 다시 오리라, 한참 다짐하고선 발걸음을 돌린다.

어느덧 땅거미가 깔려 어둑하고 쌀쌀하다. 수덕사(修德寺)는 백제 위덕왕 재위(554∼598년) 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별미라는 뻥튀기 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 입구에 들어서자 수덕여관이 손을 맞는다. 고 이응노 화백과 얽힌 사적지로, 충남도 기념물 103호다. 이 화백과 화가 나혜석, 일엽 스님 등 시대를 앞서간 예인의 사연이 깃든 곳이다.

수덕사는 천천히 돌아보면 1시간도 부족하다. 다양한 조형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웅장한 사찰 구석구석을 둘러 대웅전을 만났다. 화려하게 새 옷을 덧입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소담하고 예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았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처럼 나무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오랜 세월 수많은 마음이 모아둔 간절한 기도가 산이 되고 나무로 꽃으로 피었네요.” 누군가가 가만히 말했다. 그림 같은 수덕사를 뒤로하고 찬찬히 터미널로 발걸음을 돌린다. 직관 한 번으로는 부족한 여정이다.

서산=이설 기자 snow@donga.com
사진 이훈구 기자 ufo@donga.com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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