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관광지 교동도 르포, 1950∼70년대 모습 지닌 대룡시장… 평일에도 관광객 ‘북적’

박희제 기자

입력 2019-04-04 03:00:00 수정 2019-04-0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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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과 가까운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차량출입증 받아야 들어갈 수 있어
2014년 교동대교 개통 후 시장 활기…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 끌어


고려시대에 세운 국내 1호 향교인 강화군 교동향교. 원나라에서 갖고 온 공자상을 국내 처음으로 모신 곳이기도 하다. 강화군 제공
1일 오전 11시경 인천 강화군 교동도 대룡시장. 1950∼70년대 모습을 지닌 시장에는 평일에도 관광객이 많았다. 밀가루반죽을 즉석에서 튀긴 꽈배기를 사먹으려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섰고, 교동도 쌀로 빚은 떡집도 불티가 났다. 시계수리 명장의 ‘황세환 시계방’ 현관 옆에는 ‘태엽 풀린 내 인생/나, 여기 골목바다에/누워있네’라는 시구가 걸려 있다. 교동대교를 거쳐 교동읍내로 들어오는 길목은 한적하기 그지없었지만 시장통은 딴판이었다.

북한과 가까운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라 외지인은 검문소에서 신분을 확인한 뒤 차량출입증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 자동차로 교동대교에서 고구저수지를 거쳐 10분 정도 달리니 교동도 관광허브인 교동제비집과 대룡시장에 도착했다. 교동읍 중심인 이곳에서 북녘 땅이 훤히 보이는 화개산(높이 269m)에 오르거나 자전거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한때 쇠락 딛고 다시 북새통

미로와 같은 골목길을 따라 약국 이발소 양복점 음식점 등이 늘어선 대룡시장은 60년 세월을 자랑하고 있다. 6·25전쟁 때 황해도 연백 등지에서 피란민 3만 명가량이 교동도에 몰려들었다가 한강 하구가 막히면서 실향민이 됐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교동도에 정착해 생계를 이은 곳이 이 시장이었다고 한다. 시장 안에는 당시 지은 건물이 꽤 남아 있다.

한때 상인들이 떠나 빈 점포가 수두룩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 개통 이후 관광객이 늘고 복고풍 열기가 불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2층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상점 같은 이색 건물을 보기 위해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루곤 한다. 어느 나이 든 상인은 “가게마다 깊은 사연을 담고 있는 만큼 남북통일 이후에도 특색 있는 전통시장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장풍경이 과거를 그대로 옮겨온 듯해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관광객들이 시장 점포에서 옛 교복을 빌려 입고 다니며 연신 휴대전화 카메라를 눌러대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다. 강화군은 옛 음식먹거리촌, 추억의 길, 농산물판매장 등 시장 관광 활성화를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대룡시장 앞 ‘교동제비집’은 제비가 북한 연백평야의 흙과 풀을 물어다 교동도에 집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담아 지었다. 북한에서 온 듯한 어미제비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형상의 조각이 입구에 놓여 있다. 강화군이 KT의 지원을 받아 기가하우스, 카페, 농·특산물판매장, 자전거대여소 등의 편의시설을 갖췄다. 이곳에서 자전거를 빌려 철책을 따라 교동망향대∼난정리 전망대∼해안정자로 이어지는 해안가를 달려보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마중길, 회주길로 나눠진 길이 1.5∼10km의 자전거 코스가 있다.


강화군 교동도 교동읍성 성문 가운데 복원된 남문인 홍예문. 강화군 제공
역사 흔적 간직한 명소 유람을

대룡시장과 가까운 화개산 자락에 국내 1호 향교이자 공자상(孔子像)을 최초로 모셨다는 교동향교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인 1286년 유학자가 원나라에서 들고 온 공자 초상화를 모셨던 곳으로 전해진다. 향교 앞에는 교동도 곳곳의 비석 40개를 모아둔 읍내리 비석군이 조성돼 있다. 향교의 홍살문과 하마비를 거쳐 외삼문을 통과하면 명륜당을 만나게 된다. 그 뒤에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 4명과 유현(儒賢) 16명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다. 향교에서는 매년 음력 2, 8월 유교 성인을 기리는 석전제를 지낸다.

교동읍성과 화개산성도 둘러볼 만하다. 교동읍성은 고을 방어를 위해 조선시대 인조 7년(1629년)에 둘레 779m, 높이 6m 규모로 축성됐다. 돌로 쌓은 성곽 중간에 동, 남, 북 등 3개 성문과 문루가 있었지만 모두 무너지고 무지개 모양의 남문인 홍예문만 복원돼 있다. 화개산엔 내성과 외성을 갖춘 총길이 2.1km의 화개산성이 남아 있다. 병력 집결지로서 조선시대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교동도는 왕과 왕족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1506년 9월 교동으로 유배됐다가 2개월 만인 11월, 전염병에 걸려 숨졌다. 그가 독살됐다는 설도 있다. 교동면 고구리에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이 교동도로 유배온 것을 기록한 비. 강화군 제공
유배지와 가까운 곳에 조선시대 한증막이 복원돼 있다. 1970년대 초까지 주민들이 이용했다는 이 한증막은 10명 정도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다. 교동면 상용리에는 한글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 터가 있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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