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림-졸음과 힘겨운 싸움… 체력 동나자 환각-환청까지

로토루아=임재영 기자

입력 2019-03-09 03:00 수정 2019-03-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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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울트라 트레일러닝 160km 35시간 달려보니

근육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는 신호를 미세신경을 거쳐 머리에 전달했다. 하지만 뇌는 계속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왼쪽 무릎 부위 근육통으로 걸음을 내딛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시야에 건물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길가에서 응원하는 관중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면서 기나긴 레이스의 끝이 보였다.

없던 힘이 어디선가 생겨났고 몽롱했던 정신은 다소 맑아졌다. 근육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면서 결승선을 넘었다. 뉴질랜드 타라웨라 100마일(약 160km) 울트라 마라톤대회에 도전해 가까스로 완주에 성공했다. 지난달 9일 오전 4시(현지 시간)에 출발해 제한시간(36시간) 이내인 35시간 7분 7초 만에 결승선이 마련된 로토루아 에너지이벤트센터에 도착했다. 54세인 기자는 한국인으로 처음 이 대회에 참가해 완주하는 기록을 남겼다.

타라웨라 울트라 마라톤대회는 국제트레일러닝협회(IRTA)가 인증한 울트라트레일월드투어(UTWT)의 하나로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트레일러닝대회이다. 포장길을 달리는 마라톤과 달리 트레일러닝은 산, 숲, 하천, 사막 등 주로 비포장길을 달리는 스포츠로 최근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이번 타라웨라 대회는 50km, 102km, 160km 등의 부문에 37개국에서 1300여 명이 참가했다. 160km 레이스는 로토루아 지역 타라웨라산과 7개 호수 등을 지나는 코스로 짜였으며 기자를 포함해 129명이 도전했다. 코스 오르막을 합친 누적 해발 고도는 5300m. 제주 한라산을 성판악 코스로 정상까지 5번 정도 왕복하는 난도이다.

○ 마오리 원주민 응원 받으며 출발

160km 부문에 참가한 각국 선수들이 로토루아박물관 앞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별빛이 선명했다. 우리와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는 여름이었지만 해가 뜨기 전이어서 기온은 초가을처럼 쌀쌀함이 묻어났다. 출발선 앞으로 마오리 원주민들이 나타났다. 특유의 얼굴 표정과 악기 소리로 선수들을 환영하는 공연을 했다. 전장으로 향하는 전사들을 응원하는 춤과 음악처럼 여겨졌다.

출발 신호와 함께 선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나긴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시내 중심가를 거쳐 테푸이아 민속촌을 지날 때는 어둠 속에서도 지열 온천인 간헐천에서 솟아나는 유황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해가 떴지만 원시림에는 여전히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자란 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어둠이 점차 힘을 잃으면서 숲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땅바닥에는 봉의 꼬리를 닮은 작은 고사리가 있는가 하면 야자수 같은 나무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렸다. 뉴질랜드에는 190여 종의 고사리가 자생하는데 뒷면이 은빛인 실버 고사리는 마오리 원주민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은빛이 나는 뒷면으로 바닥에 표시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식민시대에 뉴질랜드가 ‘고사리 땅(Fern Land)’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다는 것이 실감 났다. 지금도 고사리 모양을 나라를 대표하는 문양처럼 각종 상품 등에 사용하고 있다.

숲을 벗어나자 햇빛에 반짝이는 맑은 호수가 눈을 시원하게 했다. 1886년 로토루아 지역 화산 폭발로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여러 호수가 만들어졌다. 타라웨라산과 원시림 등에서 빗물이 청명한 호수로 흘러들었다. 이들 호수는 휴양지이자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고 일부는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했다. 호수 옆 소나무 숲길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솔방울이 있는가 하면 노란 벌노랑이 꽃, 미역취, 인동초, 애기범부채 등이 피어 있었다. 일부 코스는 언뜻 보기에 제주의 올레길과 비슷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 졸음과의 전쟁, 극한의 레이스

50km쯤을 지날 때는 호수를 건너기 위해 보트를 탔다. 이동거리가 1.7km가량으로 레이스 거리에서는 제외되지만 두 발이 아닌 다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이색적인 경험이다. 땡볕으로 온몸이 발갛게 타오른 상태로 목장지대를 지난 뒤 다시 숲길에 접어들면서 두 번째 어둠도 찾아왔다. 체력이 고갈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고 앞뒤 선수와 격차가 벌어지면서 칠흑 같은 어둠에 홀로 남겨졌다. 새끼노루 크기만 한 캥거루가 부스럭거리면서 갑자기 나타날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머리에 두른 랜턴에서 비치는 한줄기 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레이스를 펼쳐야 했다.

10여 km마다 마련된 구호소(aid station)에서 간식과 과일, 음료 등을 보충했지만 100km 지점을 지나면서부터는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졸음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걸음을 잘못 디디면 원시림 계곡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타라웨라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어둠 속 계곡의 물소리는 시원함보다 공포감을 안겼다. 해가 떠오르면서 몸은 좀 따뜻해졌지만 졸음의 고통은 더 심해졌다. ‘졸면 제한 시간에 완주하기 힘들다’는 걱정 때문에 천근만근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잡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코스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 유 오케이?”라는 말이 바람 소리처럼 귀를 스쳤다. 뒤에 오던 선수가 지나면서 한마디 던진 것이다.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15분가량 지났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레이스를 이어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몸은 다시 충전된 듯 달릴 힘을 얻었다. 120∼130km를 넘기면서는 다시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환각, 환청도 나타났다. 나무줄기가 원숭이가 앉아 있는 모양처럼 보였고, 이상한 동물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결승선을 5km 남긴 레드우드 숲. 세계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레드우드는 미국 삼나무로 불리는 측백나뭇과 종이다. 관광객들이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두 번의 어둠을 헤쳐 나오면서 걷고 뛰었던 레이스의 끝이 느껴졌다. 결승선을 넘기 직전 온몸의 고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정신도 명료해졌다. ‘드디어 해냈다’는 완주의 희열과 기쁨은 고통을 연기처럼 날려버렸다. 새로운 도전과 성공은 몸과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지면서 일상생활로 복귀한 후 활력과 자신감이 상승할 것이라는 느낌을 줬다.


○ 트레일러닝 저변 확대 필요

160km 레이스에서는 97명이 제한시간 내 완주에 성공했다. 1위는 미국 출신 제프 브라우닝이 차지했으며 16시간 18분 54초를 기록했다. 로토루아 지역은 온천, 마오리 원주민 마을 등을 비롯해 산악자전거, 래프팅, 번지점프 등 다양한 레저스포츠로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곳으로 ‘자연을 수출하는 유황 도시’라고 표현할 만하다. 대회를 만든 폴 차터리스 씨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트레일러닝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지역사회에도 기여해 자연환경, 마오리 문화 등과 함께하는 스포츠 이벤트로 뿌리내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트레일러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지난해 트레일러닝의 양대 조직인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 산악러닝협회(MRA)와 파트너십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2021년 세계챔피언십 대회 개최를 공식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세계챔피언십 대회 개최 이후에는 트레일러닝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진입시키기 위한 활동을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트레일러닝과 유사한 ‘크로스컨트리러닝’은 1912년, 1920년, 1924년 여름올림픽에서 각각 개최된 적이 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팀별 경기로 펼쳐졌는데 당시 높은 온도, 공장 독성 매연 등으로 고생한 이후 올림픽 개최가 끊겼다.

아시아권에서는 마라톤 강국인 일본이 트레일러닝에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중국이 신흥 강자로 급부상했다. UTWT 시리즈로 1월 열린 홍콩 100km 대회에서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중국 선수가 차지했을 정도다. UTWT 시리즈 가운데 홍콩과 함께 아시아지역 대표 대회인 울트라트레일후지(UTMF) 등을 통해 일본도 저변 확대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2004년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이 한라산 트레일런 148km를 처음 개최했지만 참가자가 적었고 코스에 상당 거리의 포장길이 포함되는 단점이 있었다. 2012년부터 ‘트레일러닝’ 용어 등장과 함께 제주, 경기도 등에서 대회가 개최되면서 트레일러닝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으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국내에 트레일러닝을 도입한 안병식 씨(46)는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새로운 트레일러닝 대회가 속속 생겨날 정도로 동호인들이 늘고 있다”며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종목 채택 등에 대비해 정부와 기업이 선수 육성과 저변 확대에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헤드램프-생존 담요-방수 재킷 필수… 화장실 용품 필요한 대회도▼

‘아차 하면 안전사고’ 장비 철저히 챙겨야

세계적인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는 코스 길이가 대부분 100km 이상으로 준비물에 대한 점검도 철저하다. 준비가 부족하면 바로 안전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회 주최 측은 기상이 수시로 변하는 것에 대비하는 장비를 비롯해 산악지대 야간 레이스를 펼치는 데 필요한 품목 등을 까다롭게 요구한다.

이번 타라웨라 울트라 트레일러닝 대회 주최 측에서 요구한 필수장비는 헤드램프, 긴 양모 윗옷, 긴 양모 바지, 모자(버프 포함), 장갑, 생존용 담요, 방수 재킷, 밴드 또는 반창고 2m 이상, 모바일 폰, 비상식량 등이다. 이 필수 장비들을 갖추고 레이스 이전에 검사를 받아야 한다. 장비를 갖추지 못하면 등록 자체가 거부된다. 최근 트레일러닝 대회는 친환경을 표방하기 때문에 대회 주최 측에서 일회용 제품을 제공하지 않는다. 레이스 중간에 제공하는 음료 등을 받으려면 자신이 사용할 컵을 챙겨야 하고 물통 역시 반드시 배낭에 있어야 한다.

검사 장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트레일러닝용 배낭, 러닝화 등은 기본이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무릎보호대, 압박 스타킹, 러닝용 스틱 등을 갖춘다. 장시간 레이스로 바닥난 체력을 보강하기 위한 건강보조제 등도 챙겨야 한다. 선두권을 달리는 프로 선수에 비해 장시간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 후미 선수들은 식량 등 보다 많은 물품으로 배낭이 상대적으로 무겁다.

기상변화가 심하거나 기온이 낮은 지역은 더 많은 준비 물품을 요구한다. 트레일러너들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TMB)에서는 방풍, 보온용 의류와 장비 등을 추가로 준비해야 한다. 일본에서 열리는 울트라 트레일 후지(UTMF)에서는 코스지도와 휴대용 화장실 용품을 필수 품목으로 정해 놓았고 레이스 도중에도 배낭 속 물품을 검사해 벌점을 부과하기도 한다. 호주 블루마운틴 지역에서 열리는 울트라 트레일 호주(UTA) 100km 대회는 야간 도로 레이스에서 야광용 조끼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등 준비 물품은 대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로토루아=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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