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기정]미래를 말하면서 과거를 건설한다

고기정 경제부장

입력 2019-03-04 03:00 수정 2019-03-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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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경제부장
중국은 선거가 없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 따라서 실적과 성과로 공산당 내부의 검증과 견제를 뚫어야 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이을 중국 6세대 지도자 가운데 선두주자는 천민얼 충칭시 서기다. 천민얼은 ‘구이저우 발전모식(模式·모델)’을 만들어 보인 50대 정치인이다. 그는 구이저우성의 1, 2인자로 있던 시절(2012∼2017년) 21세기의 원유라는 빅데이터 산업을 이식했다.

구이저우는 마오타이주 생산지로 유명하지만 중국에선 지독한 가난으로 더 유명하다. 1인당 소득이 중국 31개 성시 중 밑에서 3번째다. 워낙 외지고 낙후한 곳이라 중앙정부 돈을 빌려와 도로 깔고 공항 짓는 게 이곳을 거쳐 간 지도자들이 했던 일이다. 천민얼은 이런 쉬운 길 대신에 미래 산업을 택했다. 당장은 티도 안 나고 주민들에게 돈을 쥐여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10년 뒤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그는 빅데이터센터 유치, 빅데이터거래소 개설, 빅데이터산업박람회 개최 등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중국의 광대한 인구가 생산해 내는 데이터를 노리고 애플, 퀄컴, 폭스콘 등이 구이저우에 둥지를 틀었다. 현대자동차도 첫 글로벌 빅데이터센터를 구이저우에 세웠을 정도다. 매년 5월 구이저우의 성도 구이양에서 열리는 빅데이터산업박람회는 중국 최대 국제 엑스포가 됐다. 올해 전시에 참가하는 400여 개 회사 중 40%는 구글 등 해외 기업이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중국 제조 2025’는 천민얼 같은 리더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과정의 총합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토목 사업의 정당성을 놓고 때늦은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다. 정부는 설을 앞둔 1월 말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해 주는 것을 전제로 지방 토목사업 리스트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달엔 전임 이명박 정부가 예타 면제 형식으로 건설한 4대강 보(洑)를 철거하겠다고 했다. 유지비가 철거비보다 더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예타는 김대중 정부 때 도입했다. 정치적 욕구를 경제 언어로 제어하기 위한 장치였다. 노무현 정부 때 예외조항 5개가 신설됐고, 이명박 정부 때 지역 균형발전 등을 더해 면제 항목을 10개로 늘렸다. 4대강 사업을 위해서였다. 문재인 정부도 지역 균형발전 명분으로 철도와 도로, 공항을 예타 면제 방식으로 짓기로 했다. 선정된 사업 상당수는 경제성이 부족하다고 진즉에 결론이 난 건이다. 그러면서도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4대강 보를 해체하기로 한 건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이번에 전임 정부가 해놓은 사회간접자본(SOC)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선례를 만들었으니 다음 정부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는 씨앗이 뿌려졌다. “우리가 만든 SOC만 정의롭고 경제적”이라는 이상한 경쟁과 갈등이 예고된 셈이다. 보 철거 결정에서 보듯 지방에서도 이 논란에 가세할 것이다. 공항 활주로에 고추를 말리는 한이 있더라도 SOC 사업은 무조건 따와야 한다고들 하는 지자체장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옆 나라는 미래 먹거리를 향해 지도자들이 전력 질주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한편에선 지역별로 세금 갈라먹기 경쟁을 하고 다른 한편에선 SOC 선명성 경쟁을 하는 현실에서 굳이 국가 간 경쟁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번 예타 면제 사업에 들어갈 돈이 24조 원인데, 올해 빅데이터 등 미래 산업에 투입하는 재정은 1조5000억 원에 불과하다. 올해를 포함해도 앞으로 5년간 10조 원 투입에 그친다. 입으로는 다들 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만 현실에선 아직도 과거의 틀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대부분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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