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 강물은 거스를 수 없어… 수문 여는 건 김정은 몫

세종=이새샘 기자

입력 2019-03-02 03:00:00 수정 2019-03-04 15: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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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현재’가 ‘북한의 미래’ 되려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전인 지난달 24일 베트남 하노이 시내의 한 건물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을 묘사한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하노이=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지금 우리 회사 종업원 2000명 가운데 90%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17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죠.”

의류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한용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 회장이 자신이 처음 베트남에 온 2002년과 비교할 때 지금 베트남은 완전히 다른 나라라 해도 될 정도라고 했다.

2011년 베트남에 온 김강욱 DB손해보험 베트남 법인장은 이 나라의 발전상을 건물 높이로 체감하고 있었다. 2011년 처음 호찌민에 왔을 때 최고층 아파트가 8층이었지만 지금은 50층, 60층짜리 마천루가 시내 곳곳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응우옌푸쫑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나 “베트남은 (북한에) 일어날 수 있는 좋은 본보기”라고 말했다. 40여 년 전만 해도 적국으로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을 새로운 경제발전의 모델로 제시한 셈이다. 28일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났지만 앞으로도 북-미가 베트남식 경제개발 모델을 카드로 협상을 이어갈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 개혁·개방으로 해외투자 유치한 베트남

1985년 베트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230달러에 불과했다.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난 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시도한 베트남은 주민 반발에다 가뭄이 겹치면서 고통을 받았다.

결국 베트남은 1986년 베트남어로 쇄신이라는 뜻인 ‘도이머이’ 정책을 앞세워 개혁·개방에 나섰다.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해 외국 자본 유치에 팔을 걷어붙인 것. 1989년에는 전력, 교통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품 가격이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하고 배급제도 폐지했다.

경제 발전이 본격화한 것은 1994년 미국이 베트남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1995년 양국 국교가 정상화하면서부터다. 베트남이 싼 노동력으로 만든 제품을 수출하면서 해외 자본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의 1인당 GDP는 2790달러로 개방 전의 12배 수준으로 늘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7.1%에 이른다. 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베트남의 경제 발전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시장 질서에 편입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며 북한도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 “‘도이머이’는 북한이 참고할 모델 중 하나”

김강욱 법인장은 “베트남 현지인들은 ‘만약 북한이 개방되면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대신 북한으로 옮겨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종종 한다”고 전했다. 그만큼 베트남에서도 북한의 현재 경제 상황과 개방 전 베트남의 상황을 비슷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베트남식 ‘도이머이’ 모델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1980년대 베트남은 농업 종사자가 전체 국민의 80%에 이르고 산업 분야에서 농·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인 농업 국가였다. 이 때문에 농업 부문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생산성이 크게 증대돼 또 다른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돼 저렴한 노동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반면 북한은 농업 비중이 20∼30% 수준이다. 이미 상당히 산업화가 진행된 경제구조인 셈이다. 베트남이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년 뒤 개방을 시도했던 반면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다. 최근 경제제재로 해외 무역이나 원조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의 현 경제 상황이 1980년대 붕괴 직전의 동유럽 공산국가와 유사하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북한이 베트남과 중국의 개혁·개방 모델을 참고하고 있다는 흔적은 곳곳에 나타난다. 북한은 2016년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을 시행하며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업 분야에서 자율성을 강조하는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국경과 해안 지역을 망라한 22개 경제개발구를 지정하기도 했다.

이해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도 외자 유치가 경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증거”라며 베트남과 중국의 개방 정책을 북한이 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김정은 독재체제가 경협 걸림돌

향후 북한이 외자를 원활하게 유치할 수 있을지는 북한의 정치 안정에 달려 있다는 전망도 있다. 1인 독재체제로 권력을 세습해온 북한과 달리 베트남은 국가주석, 공산당 제1서기, 총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 지도체제다. 일단 개방하면 이를 되돌리기 쉽지 않은 베트남과 달리 북한은 김 위원장의 입지가 흔들릴 경우 정책 방향이 뒤집힐 수도 있다.

베트남 현지 법인에서 최근까지 근무한 기업 관계자는 “베트남 정부는 해외 기업의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점점 더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펴고 있다”며 북한이 경제 발전을 원한다면 이런 개방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 해외투자자와 기업에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이종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김정은은 집권 이후 경제개발특구, 대외무역 다각화, 해외투자 유치 등을 추진했지만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성과를 낼 수 없었다”고 진단했다.
 
세종=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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