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원대 노트북’에 5500명 투자…크라우드 펀딩 키우는 ‘덕투’

신동진 기자

입력 2019-02-13 03:00 수정 2019-02-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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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트렌드 이끄는 밀레니얼 세대

‘브랜드 가격 거품을 뺀 20만 원대 파격 울트라북.’

노트북 제조 스타트업 ‘베이직스’가 지난달 22일 온라인에 이런 제목을 띄우고 크라우드 펀딩(자금 모집)에 들어가자 주문이 쇄도했다. 목표 금액인 500만 원을 넘어선 건 순식간이었다. 하루 만에 목표액의 1만7000%를 넘겼다. 3주가 지난 현재 모금액은 17억9000여만 원. 약 5500명의 투자자(주문자)가 몰리며 국내 크라우드 펀딩 역대 최고 금액을 기록했다.

베이직스는 대기업 노트북과 비슷한 스펙의 제품을 최대 절반까지 저렴하게 판다. 다만 물건을 미리 만들어놓고 파는 게 아니라 선주문을 받아 목표액이 달성되면 생산에 들어간다. 투자자는 선주문을 하는 대가로 저렴하게 제품을 받는 이른바 보상형(리워드형) 크라우드 펀딩이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대중의 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 펀딩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자신들이 좋아하는 분야나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며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덕투’(덕질+투자)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 중고차(갤로퍼) 리빌드 수제 자동차 업체 ‘모헤닉게라지스’와 스쿠버다이버를 위한 손목시계 모양의 감압계산기를 개발한 ‘바이브메모리’ 등이 마니아들의 적극적인 투자로 성장한 사례다.

국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1위 와디즈는 1월에만 103억 원을 모집해 월간 최대 거래액을 찍었다고 12일 밝혔다. 연간 펀딩 액수는 2016년 106억 원, 2017년 282억 원, 지난해 601억 원으로 국내 처음으로 누적 1000억 원을 넘었다. 국내 크라우드 펀딩 시장은 지난해 1300억 원 규모로 글로벌 시장 규모(약 13조 원)의 1% 수준이지만 매년 곱절 이상 확대되고 있다.

8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사무실에서 만난 신혜성 와디즈 대표는 크라우드 펀딩 고속 성장의 이유로 ‘메가 트렌드의 변화’를 꼽았다. 투자와 소비의 목적이 더 이상 수익이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에 머물지 않고 가치와 가심비(가격 대비 만족감)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 신 대표는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초 출생)들은 대기업의 브랜드가 아니라 스타트업이 만든 콘셉트를 더 선호한다”면서 “글로벌 브랜드와 유통채널들도 상품기획자가 소비자에게 제품을 추천하던 기존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유튜브, 에어비앤비처럼 공급자가 직접 상품을 올리는 플랫폼이 대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 대표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거쳐 산업은행에서 기업금융 업무를 하다 2012년 와디즈를 설립했다. 투자자에게만 유리한 벤처 투자 시장의 정보 비대칭을 풀어보자는 게 창업 목적이었지만 갈수록 메이커들이 제공하는 새롭고 독특한 상품과 그를 지지하는 팬덤 현상에 관심이 갔다. 이 때문에 와디즈는 펀딩 참여자를 투자자가 아니라 기업의 아이디어와 가치를 응원한다는 뜻의 서포터로 부른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제도권에서 투자받기 어려운 아이템에 자금 조달과 사업성 검증이 가능하다. 수요 기반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재고 부담도 없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기존 유통채널에서 러브콜이 오고, 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최대 15억 원)을 통해 더 큰 자금도 모집할 수 있다. 파도의 힘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파력발전 업체 ‘인진’과 바이오 스타트업 ‘쿼럼바이오’ 등은 사업 초기 기관투자가의 외면으로 자금난을 겪다가 크라우드 펀딩으로 기사회생했다.

메이커와 서포터의 끈끈한 소통도 와디즈의 차별점이다. 투자 설명서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포터의 질문과 지적에 메이커가 일일이 답변을 달고 상품 출시 과정을 중계해 상시 콘퍼런스콜 역할을 한다.

2016년부터 향후 수익을 기대하며 스타트업의 지분, 채권 등에 투자하는 증권형 펀딩이 허용되면서 크라우드 펀딩 금액이 커지는 추세지만 원금 손실 위험도 유의해야 한다. 지난달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시행되며 크라우드 펀딩의 증권 발행 한도가 7억 원에서 15억 원으로 확대됐다. 와디즈 관계자는 “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은 장외 주식 투자 같아서 애초에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품이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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