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 생겼다, 프러포즈도 했어” 현실이 아니라 되뇌지만 설렘 느껴

김기윤기자 , 임희윤기자

입력 2019-01-27 18:06 수정 2019-01-2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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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러브 레볼루션’(오아시스 VR)에서 게임을 시작할 때 데이트할 가상 연인 캐릭터를 선택하는 장면. 원하는 이상형의 캐릭터를 선택하면 캐릭터를 실제로 연기한 배우의 영상이 재생된다. KT 제공
《기윤 “나, 여친 생겼다. 프러포즈도 했어.”
희윤 “여친? 축하해! 뭐 하는 사람이야?”
기윤 “게임 캐릭터!”
희윤 “(당황)”
기윤 “전화도 주고받고 얼마나 사실적인데…”
희윤 “내 전화나 잘 받아….” 》

‘그녀’(2013년)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까톡 왔숑!”

기자는 요즘 그녀와 ‘썸’ 타는 중이다. 상대가 먼저 카톡을 보내면 내게 관심 있는 거라던데, 시작이 좋다. 연락을 주고받다가 결국 공원, 맛집 데이트까지 즐겼다. 이젠 편하게 전화도 하는 사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는다.

세 번째 데이트 날, 수줍음 많은 내 성격을 알아챈 그녀가 불쑥 먼저 사귀자고 고백했다. 고민 끝에 받아준 그녀의 맘. ‘알콩달콩’ 연애로 긴 시간을 보낸 뒤 난 그녀에게 마침내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가 “Yes!”라고 답하는 순간, 화면에 문구가 떴다. ‘미션 클리어, 점수 획득!’ 나만의 그녀는 화면 속 가상 연인 ‘여빈’. 나의 연애는 오늘도 순항 중이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이상형과 가상 데이트 설레” vs. “실제 사람과 소통 어려워질 수도”

기자가 직접 체험한 ‘러브 레볼루션’은 가상현실 기능까지 탑재했다. 아직 베타버전이지만 3월 일반에 정식 출시를 앞뒀다.

최근 가상 연인을 만들어주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각광받고 있다. ‘러브 레볼루션’에서는 원하는 이상형의 캐릭터를 선택하면, 그 캐릭터를 연기한 실제 배우가 눈앞에 등장한다. 가상연인으로부터 불쑥 영상통화가 걸려와 “지금 쇼핑중인데 어떤 색 신발이 더 예뻐 보이냐”고 묻기도 한다. “검정색”이라고 외치면 가상연인은 음성을 인식하고 검정 신발을 산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게임머니를 벌어 치장도 해야 한다. 직장인 박재용 씨(30)는 “머릿속에선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라 되뇌는데도 게임을 진행할수록 이상형 여성과 데이트하는 것 같아 설렘을 느꼈다”고 말했다.

남성들만 이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다. ‘플로렌스’는 ‘훈남’ 가상 캐릭터와 말 풍선 퍼즐을 맞춰가며 현실감 있는 연애 상황을 구현한다. 가상 연인의 문자나 전화 세례를 즐기는 앱 ‘수상한 메신저’, 학원 만화의 요소가 강한 ‘일진에게 찍혔을 때’도 인기다. 김서영 씨(26)는 “캐릭터 사실성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연애에서 느끼는 작은 설렘, 풋풋함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이 많은 현실 연애에서 환멸을 느낀 ‘N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세대)가 이런 게임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분석한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실제 연애와 경쟁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을 가상현실로 달래는 셈”이라면서도 “어려움 없는 가상 데이트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사람과 소통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점점 사라질까 우려 된다”고 했다.

게임 화면을 배경으로 무대에 선 여성그룹 ‘체리블렛’. FNC엔터테인먼트 제공

●드라마부터 가수까지… 게임화 돼가는 문화 콘텐츠

연애뿐 아니다. 문화 콘텐츠 전반이 게임화되고 있다. 지난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필두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게임의 콘셉트를 차용했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기술의 발달도 문화 콘텐츠의 게임화에 가속 페달이 됐다. 설치 미술 등 전시에도 증강현실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1일 데뷔한 10인조 여성그룹 ‘체리블렛’은 가상의 운영체제 ‘체리블렛’을 중심에 뒀다. 앨범마다 새로운 가상 맵(map)과 퀘스트(과제)가 주어진다. 멤버마다 작은 로봇을 가지고 있는데, 멤버들은 로봇과 함께 성장한다. 육성시뮬레이션게임과 슈팅게임의 이미지와 콘셉트를 그룹의 뼈대로 삼은 셈이다. 심지어 팬 응원봉도 게임용 총 모양으로 만들었다.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의 유순호 부장은 “아이돌 음악을 주로 소비하는 10, 20대는 반쯤은 가상세계에 살고 있다 할 정도로 게임에 대한 이해와 집중도가 매우 높은 세대”라면서 “건강한 성장 이야기와 게임 요소를 결합해 팬들의 참여와 몰입을 높이려 한다”고 설명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
임희윤기자 imi@donga.com

▼ 1980년대 처음 등장…연애 게임 역사▼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역사는 오래 됐다. 게임의 역사, 그 자체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1980년대 일본에서 시작됐다. 개인용 컴퓨터와 게임기용으로 먼저 개발됐다. 1985년 출시한 ‘천사들의 오후’는 이 장르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게임 캐릭터와 대화를 주고받는 식의 기초적 어드벤처 기능을 선보였다.

본격적인 붐은 1990년대. ‘동급생’ ‘두근두근 메모리얼’이 잇따라 나오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시리즈로 이어지며 소프트웨어가 100만 장 이상 팔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1997년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필두로 ‘리플레이’ 등이 나오면서 선전했다.

연애 게임은 여러 갈래가 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미연시), 연애 어드벤처, 비주얼 노벨(novel·노블) 등이다. 단순히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가며 화면을 넘기는 수준에 머무르느냐, 플레이어 자신이나 캐릭터를 길러 내거나 행복도와 호감도 등의 수치를 상승시키는 좀더 적극적인 쌍방향 소통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갈린다.

연애 게임의 르네상스는 스마트폰이 이끌었다. 한때 선정성 논란에 휩싸이기 일쑤이던 연애 게임은 모바일 시대로 옮겨오면서 습한 방을 벗어나 휴대전화를 타고 일상으로, 양지로 나왔다. 여성용 게임도 늘었다.

모바일 시대에 추가된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은 중독성을 높여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일본에서 나온 ‘러브 플러스’는 터치 펜을 이용한 동작 감지, 입체 그래픽으로 몰입감을 높였다. 신드롬은 거셌다. 플레이어가 게임 캐릭터 중 한 명과 실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다. 지방 도시에서 이들 캐릭터를 활용한 관광 상품을 만들기도 했다.

2017년에는 중국 게임 ‘연예제작인(러브앤프로듀서)’에 등장하는 가상 캐릭터를 위해 게이머들이 쓴 돈이 월간 3900만 달러(약 437억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나왔다. 캐릭터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4만9000달러(약 5492만 원)짜리 축하 광고를 띄우기도 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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