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0점 남편, 집에선 낮은 포복” “호호, 알아서 잘해줘 고맙죠”

강홍구 기자

입력 2019-01-12 03:00 수정 2019-01-12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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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커플]<2> 신치용-전미애 부부

삼성화재 배구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치용 전 감독(현 자문역)과 여자농구 국가대표 출신 전미애 씨 부부가 경기 용인시 자택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다정한 포즈를 취해 달라는 요청에 전 씨는 “이 사람과 안 친해요”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신 전 감독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1980년 태릉선수촌에서 만나 1983년 결혼한 두 사람은 40년째 서로의 곁을 든든히 지켜오고 있다. 용인=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처음 만났을 때 한쪽 눈에 다래끼가 나서 안대를 하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한 눈’에 반한 거죠. 그땐 스무 살이라 그런 순진한 선택을 할 수 있었나 봐요. 지금도 딸들이 놀린다니까요. ‘엄만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전미애)

“거 참. 탁월한 선택이었대도. 허허.”(신치용)

두 칸짜리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은 부부는 끊임없이 토닥대며 애정을 과시했다. 1995년 팀을 맡아 2015년까지 20년 동안 전쟁터 같은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온 ‘코트 위의 제갈공명’ 신치용 전 삼성화재 감독(64·현 자문역)이 유일하게 갑옷을 벗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아내 전미애 씨(59) 곁뿐이었다.

겨울리그 최다연승(77연승), 슈퍼리그 8연패, 프로배구 V리그 8회 우승 등 한국 남자배구의 유례없는 성공 스토리는 바로 아내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남자배구, 여자농구 국가대표의 결혼으로도 화제가 됐던 스포츠 스타의 만남은 둘째 딸 신혜인(34·여자 프로농구 출신)과 사위 박철우(34·프로배구 삼성화재 소속) 부부로 대를 잇기도 했다. 1983년 결혼 뒤 37년째 서로의 곁을 지켜온 ‘절친 커플’ 신치용, 전미애 부부를 9일 경기 용인의 자택에서 만났다.


○ 태릉선수촌에서 꽃피운 사랑

다섯 살 터울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80년 태릉선수촌에서였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두 사람은 농구와 배구 종목 숙소가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지게 됐다. 그는 그녀의 순수함이, 그녀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듬직함이 좋았다. 예상외로 예쁜 신 씨의 글씨체도 마음에 들었다. 숨길 것도 없었다. 선수촌 안에서 공공연히 연인 사이임을 밝혔다.

“지금 생각하면 맹랑했어요. 제가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하고 있으면 이 사람이 기자들을 만나서 우리가 결혼할 거라고 인터뷰를 했어요. 그땐 이 사람 말처럼 결혼하면 운동을 그만둬야 하는 줄 알았어요. 당시 인식이 그랬죠.”(전)

“그때는 시대가 그랬고. 감독할 때도 그렇고 결혼할 때도 생각해 보면 내가 세뇌교육에 소질이 있긴 있나봐. 허허허. 선수들 다룬 솜씨가 다 이런 데서 나온 거 아니겠어.”(신)

국가대표로 촉망받던 전 씨가 결혼을 하겠다며 은퇴 의사를 밝히자 구단과 감독이 만류에 나섰다. 당시 전 씨가 뛰던 한국화장품은 배구단을 창단해 감독 자리를 맡기겠다는 당근까지 내밀며 신 씨에게 결혼을 미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저는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이 사람과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구단에 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이 사람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황당해요.”(전)

“어허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앞으로 내가 당신한테 더 맥을 못 추겠네.”(신)

“그 정도로 믿었던 거죠.”(전)

“오죽했으면 거제 갑부에게 시집간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겠습니까. 선수로서 한창때인데 나를 믿고 와준 게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이 사람이 큰소리 빵빵 쳐도 가만히 있죠.”(신)

두 사람은 1983년 5월 1일 신 씨 모교인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 100점짜리 감독, 0점짜리 남편

스물여덟, 스물셋의 나이로 결혼생활을 시작한 두 사람은 경기 부천에 신혼집을 차렸다. 당시 한국전력 배구단 코치였던 신 씨는 친구 도움까지 받아 어렵게 보금자리를 꾸렸다. 신 씨는 “그때 내겐 오로지 운동밖에 없었다. ‘지도자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 보니 아무래도 가정에는 소홀했다. 두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즌 중에는 소속팀 코치, 비시즌에는 국가대표팀 코치 등을 맡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코트에서 보냈다. 두 딸이 자라는 동안 아빠로서 숙제 한번 도와주지 못했다. 1995년 삼성화재 초대 감독을 맡은 뒤로 상황은 더 심해졌다.

“구단이 보면 이 사람 같은 감독은 없겠죠. 오로지 선수, 훈련, 성적만 생각하니까. 반대로 가정에서 보면 빵점도 아까워요. 마이너스야 마이너스.”(전)

“저도 그 사실을 아니까 집에선 늘 낮은 포복으로 다녀요. 이 사람 덕에 내가 감독으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신)

“그럼 남편으론 실패했다는 거네?”(전)

“어허, 거. 사람 참.”(신)

신 씨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다음 날 흐트러짐 없는 것으로 소문났다. 오전 6시 전에 출근해 가장 먼저 감독실의 불을 켜는 건 그가 감독생활을 하며 한 번도 어겨 본 적 없는 원칙이다. 대표팀 코치 시절 오전 4시 20분에 기상해 태릉선수촌 근처 불암산에 오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술을 좋아하면서도 부지런함을 잃지 않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전에 살던 집 근처에 생맥줏집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술을 마시면 꼭 2차로 거기를 가요. 근데 자리가 길어지면 집엔 들르지 않고 바로 숙소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다음 날 생맥줏집 사장한테 이 사람이 왔다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정말 황당하지 않겠어요?”(전)

“밤은 늦었고, 피곤하고. 어차피 새벽에 나가야 하니까 바로 숙소로 간 거지.”(신)

“그건 자기 생각이죠. 말 한마디 없고.”(전)

부부 동반 모임을 마친 뒤 전 씨가 차를 운전해 귀가할 때의 일이다. 술을 마신 뒤 깜빡 졸던 신 씨가 눈을 떠보니 차가 배구단 숙소가 아닌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사님, 이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술김에 대리운전 기사가 운전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 신 씨는 “무의식 속에서도 습관적으로 집이 아닌 숙소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새벽에 다른 스태프보다 먼저 출근해야 직성이 풀렸다. 감독이라고 풀어진 모습을 보이면 어떤 선수가 좋아하겠나”라고 설명했다. 전 씨가 옆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안일도 온전히 전 씨의 몫이었다. 경기 부천에서 시작해 현재의 용인까지 네 차례 집을 옮기는 동안 이사 당일 신 씨가 집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 씨가 대표팀 일정으로 해외에 나간 동안 이사한 적도 있다. 그 때문에 신 씨는 떠난 집과 돌아간 집이 다른 경험을 하기도 했다.

“(딸) 혜인이가 (배구 선수) 철우랑 결혼한다고 할 때 ‘운동선수랑 한집에서 살려면 네가 벽에 못도 박고, 형광등도 직접 갈아야 한다’고 말했다니까요.”(전)

“이 사람아. 내가 못질을 얼마나 잘한다고. 하지만 나에겐 늘 팀이 먼저야.”(신)


○ 선 굵은 아내, 세심한 남편

올해 신 씨가 구단의 자문역(비상근고문)으로 물러나면서 부부는 처음으로 겨울시즌을 온전히 함께 보내게 됐다. 부부는 인터뷰 내내 “우리 두 사람은 너무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1995년 신 씨가 삼성화재 감독을 맡게 된 것도 전 씨의 생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삼성화재 대표이사를 처음 만날 때까지만 해도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어요. 솔직히 전 한국전력에 남을 생각이 컸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데 팀을 옮겼다가 잘못해서 1, 2년 만에 잘리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신)

“저는 이 사람하고 삼성이라는 구단이 체질이 맞을 것 같았어요. 워낙 준비를 꼼꼼히 하는 사람이니까 거기에 풍부한 지원까지 받으면 날개를 달 것 같은데 본인은 자꾸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죠. ‘나 같으면 1년 하고 잘리더라도 해보고 잘리겠다.’”(전)

“당신은 너무 낙관적이야. 나는 당신하고 두 딸 생각에….”(신)

“솔직히 이 사람이 1년 하고 잘릴 거라고 생각하면 제가 하라고 했겠어요.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죠.”(전)

“내가 잘리면 자기가 포장마차라도 해서 먹여 살리겠다는데, 어디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신)

“전 할 수 있어요. 지금도 하라면 할 수 있어요.”(전)

“내가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안다. 허허.”(신)

성격만큼 좋아하는 것도 서로 다르다. 전 씨가 편히 쉴 수 있는 휴양지를 선호한다면 신 씨는 이것저것 둘러볼 수 있는 관광지를 선호한다. 신 씨가 여행지에 가서도 습관처럼 오전 6시부터 움직여야 한다며 가족들을 독촉해 사소한 분란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온도차가 있는 부부지만 배구, 그리고 두 딸 혜림(36), 혜인 씨에게서 태어난 네 손주 이야기를 할 때면 이내 한마음이 된다.

2017년 9월 경기 용인 삼성트레이닝센터에 모인 신치용, 전미애 부부와 둘째 딸 신혜인, 박철우 부부. 용인=김종원 스포츠동아 기자 won@donga.com
○ ‘줄리엣’의 아빠, ‘로미오’의 장모

신치용, 전미애 부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둘째 딸 신혜인과 사위 박철우 부부다. 당시 삼성화재의 라이벌인 현대캐피탈 에이스였던 박철우와 신혜인의 러브스토리는 가문의 반대를 무릅쓴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교되기도 했다. 실제로 신 씨는 운동선수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세 모녀의 설득으로 결국 결혼을 수락했다. 박철우가 2010년 자유계약선수(FA)로 삼성화재로 이적한 뒤에도 신 씨에게 집에서도 장인어른이라는 호칭 대신 감독님으로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가급적 집에서는 배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도 장인, 사위만의 약속이다. 전 씨는 “남편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함께한 가족 식사 자리에서 철우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제 장인어른으로 불러도 되겠느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이 사람이 감독 때 철우를 호되게 야단치는 장면이 아직도 인터넷에 돌아다녀요. 볼 때마다 어찌나 사돈댁에 민망하던지. 전에 경기를 지는 날에는 철우가 같이 가족 식사를 못하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감독님 앞에서 밥이 안 넘어간다고.”(전)

“나는 외국인 선수고 사위고 안 가려요. 철저하게 해야지. 지금 철우 기본기 좋아진 것 봐.”(신)

“그러게. 연결이 좋아지긴 했어. 요샌 도리어 철우가 경기 안 풀리는 날에 이 사람이랑 밥 먹고 싶어 한다니까요. 함께 경기를 복기하고 싶나 봐요.”(전)

“그래서 요새는 저녁밥을 두 끼 먹는 경우도 있다니까. 허허.”(신)

최근에는 혜림, 혜인 씨 가족까지 세 가구가 함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신 씨 부부 주방 창문으로 두 딸이 사는 아파트가 보일 정도다. 전 씨는 아침부터 큰딸 집으로 넘어가 딸들과 함께 네 손주를 돌본다. 신 씨도 평창 겨울올림픽 성화 봉송 때 딸 혜인 씨와 손녀 소율 양(6)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거실에 두고 자주 들여다본다.

“이제야 노는 맛을 알게 됐다”는 신 씨의 말과 달리 그는 최근 진천 선수촌장 또는 프로배구단 감독 후보 등으로 끊임없이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아내 전 씨는 “그렇게 살고도 또 일을 하고 싶냐”며 말리고 있지만 정작 신 씨는 “아직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신 씨의 새로운 출발에도 관심이 쏠린다.

인터뷰를 마친 뒤 서로에게 건넬 덕담을 부탁했다.

“이젠 그저 건강이 최고죠. 손주들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신)

“일찍 결혼을 해서 젊은 엄마가 됐는데 이젠 젊은 할머니가 됐어요. 할머니가 되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요새는 손주 보는 재미에 사는 거 같아요. 호호.”(전)

“이 사람아 덕담하라니까. 덕담.”(신)

“덕담할 게 없어요. 여태껏 알아서 너무 잘해 왔잖아. 안 그래요?”(전)

첫 만남 이후 40년째 이어온 ‘절친 커플’의 믿음이 보였다.

용인=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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