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규에 없다고 고발당해… 한국선 신상품 개발하다 범죄자 될 판”

황태호기자

입력 2018-10-02 03:00 수정 2018-10-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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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공화국엔 미래가 없다]<1> 규제 그물에 사업 접는 스타트업


“경찰에 불려 갈 수 있다고 하니 겁이 나더라고요.”

지난달 20일 서울 서초구의 코워킹 스페이스 ‘드림플러스’에서 만난 핀테크 스타트업 ‘콰라’의 변창환 대표는 1년 전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형사처벌을 받으면 금융회사의 대주주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핀테크 스타트업 창업가에게 경찰 수사는 사형선고와 같다.

변 대표가 2014년 창업한 콰라는 2016년 6월 국내 첫 인공지능(AI) 기반 테마형 펀드 ‘손정의따라잡기’ 펀드를 출시했다. 벤처투자의 귀재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AI로 분석해 100만 원의 소액도 투자가 가능하도록 한 상품이다. 2주 만에 목표액(1억 원)을 달성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곧바로 금융감독원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현행법상 해당 상품의 업권을 명확히 규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금감원은 “판매를 계속하면 경찰 수사를 받을 수도 있다”며 “차라리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호주에서 사업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권했다.

결국 콰라는 펀드 판매를 접고 AI 기반 투자정보 제공으로 사업 모델을 바꿨다. 콰라와 비슷한 시기에 설립해 유사한 사업 모델을 내놓은 미국 핀테크 기업 ‘로빈후드’는 올해 5월 3억6000만 달러(약 388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며 56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평가받았다.


○ 스타트업, 기존 법규로 분류 못 하면 ‘불가’

스타트업이 대기업 위주의 기존 성장 모델에서 진화한 혁신성장의 씨앗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정작 스타트업이 새로운 사업 모델을 내놓으면 기존 규제에 가로막혀 사업을 접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보기술(IT) 전문 로펌 테크앤로의 구태언 변호사는 “글로벌 100대 스타트업 기업 중 56곳은 한국의 규제환경 속에선 사업을 아예 할 수 없거나 조건부로만 가능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만큼 규제장벽이 견고하다”고 말했다.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모집해 개인에게 대출을 해주는 ‘기관투자가형 P2P’를 내놓은 핀테크 스타트업 ‘써티컷’도 콰라와 같은 좌절을 겪었다. 2016년 11월 금감원으로부터 약관 승인까지 거쳤지만 금감원 내부에서 부서별로 다른 해석을 하면서 최종 인가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1년의 실기 끝에 해외펀드 조성으로 사업 방향을 돌렸다. 서준섭 대표는 “수십억 원을 들인 서비스 인프라가 무용지물이 됐다”고 토로했다.

2015년 김주윤 대표 등 대학생 3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스타트업 ‘닷’은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용 스마트워치를 개발했다. 디스플레이 대신 점자로 시간뿐만 아니라 날씨, 내비게이션 등 다양한 정보를 표시할 수 있어 시각장애인 팝스타 고 스티비 원더의 주문을 비롯해 14만 대의 사전주문을 받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장애인 지원사업 보조금 지급 대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현행 법규에 이 제품을 등록할 품목이 없어서다.

이런 스타트업 진입장벽은 산업을 진흥하겠다고 만든 각종 법규가 규제로 작동하면서 더 견고해진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따르면 ‘진흥’이나 ‘보호’ ‘육성’이 들어간 법규는 600건이 넘는다. 하지만 이 같은 법규들은 특정 부처에 인허가권을 주거나, 설익은 개념 정의로 산업발전을 오히려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 ‘범죄자’ 취급받는 창업가들

스타트업에 씌워지는 규제의 올가미는 창업가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3차원(3D) 프린터 부품 판매 스타트업 ‘삼디몰’은 소비자가 부품을 입맛대로 골라 3D 프린터를 조립하도록 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제품안전협회는 2016년 6월 이 회사 김민규 대표를 형사고발했다. 이미 안전 인증을 받은 부품만 판매하고 있는데도, 완제품에 대한 인증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협회의 논리대로라면 각기 다른 구매자가 조립한 각기 다른 3D 프린터들이 모두 안전 인증을 받아야 한다. 한 모델의 완제품 인증에는 400만 원 가까운 비용이 소요된다. 사실상 사업을 접으라는 소리다. 1년이 넘는 재판 과정 끝에 지난해 말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경찰서를 오가는 경험이 쌓일수록 혁신보다 규제를 어떻게 피할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스타트업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사업을 벌이는 시도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9월 정부가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한 암호화폐공개(ICO) 분야가 대표적이다. 급기야 스타트업 기업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8월 ‘스타트업은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포럼은 “정부는 네거티브 규제, 규제 샌드박스법 등 신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일선 현장은 네거티브 규제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며 “스타트업은 방어적으로 사업을 하고, 투자자는 한국 규제 상황에 움츠러들고, 혁신성장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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