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모터스포츠의 성지, 영국 ‘굿우드’서 즐기는 경주쇼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2018-09-21 03:00:00 수정 2018-09-21 09: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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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클래식 카 경주지만 치열한 경주가 실전을 방불케 한다. 굿우드 에스테이트 컴퍼니 제공
자동차 애호가들에게는 ‘성지’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다. ‘녹색 지옥’이라 불릴 만큼 코스가 험하기로 유명하면서 일반인도 직접 달려볼 수 있는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이 그렇고, 아름다운 클래식카들이 역사적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경연을 펼치는 페블비치 콩쿠르 델레강스나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 데스테 같은 클래식카 콩쿠르가 그렇다. 풍부한 클래식카 콜렉션을 갖춘 자동차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클래식 카와 모터스포츠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치체스터에 있는 굿우드 서킷이다. 그곳에서 열리는 여러 클래식 카 및 모터스포츠 행사들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 경주차가 직접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 경주 선수와 업계를 이끄는 사람들 등 당대와 지금의 살아있는 전설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행사들과 격을 달리한다.

굿우드 서킷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공군의 비행장으로 건설된 곳이다. 영국은 전쟁 중 영국 공군뿐 아니라 유럽 전선에 투입되는 연합군 공군력이 집결하면서 수많은 비행장이 지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이 철수하고 영국 공군 규모가 축소되어, 이들 비행장은 거의 방치되었다.

그런 곳에 오래지 않아 자동차 애호가들이 몰려들어 자동차 경주와 이벤트를 즐기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행기 이착륙을 위해 포장되거나 정돈된 활주로는 자동차가 속도를 내며 달리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길이와 너비를 갖췄고, 주기장이나 격납고와 이어지는 유도로까지 합치면 꽤 재미있게 달릴 수 있는 코스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영국 각지에 비행장에 뿌리를 둔 자동차용 서킷이 생겼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는 자동차 클럽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굿우드 서킷을 비롯해, BBC 방송의 자동차 버라이어티 TV 프로그램 ‘톱 기어(Top Gear)’가 제작된 던스폴드 파크, 지금도 포뮬러 원(F1) 영국 그랑프리 등 세계적 모터스포츠 이벤트가 열리는 실버스톤 서킷, 영국 풀뿌리 모터스포츠의 산실인 캐슬 콤과 스럭스톤 서킷 등이 대표적이다. 굿우드도 원래 있던 두 개의 활주로 주변을 감싸고 도는 길을 서킷으로 개조해 1948년부터 1966년까지 다양한 형태의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경주가 열렸다.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 현장에는 포르쉐 탄생 7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이후 유지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거의 방치되었던 굿우드 서킷은 서킷을 포함해 일대에 큰 규모의 저택과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리치먼드 공작 가문이 1993년에 첫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Festival of Speed)를 열면서 다시 자동차와 모터스포츠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한동안 이어진 롤스로이스 인수 과정에서 폴크스바겐그룹과 경쟁을 벌이다가 상표사용권을 얻고 근거지인 크루에서 밀려난 BMW가 새 롤스로이스 공장을 지어 옮긴 곳도 굿우드였다. BMW가 굿우드를 롤스로이스의 새 근거지로 삼은 데에는 장소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자동차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이벤트가 만들어낸 지역 이미지의 영향이 컸다.

현재 굿우드를 대표하는 자동차 관련 이벤트는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와 리바이벌 두 가지다.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는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한 명차들을 한데 모아 굿우드 사유지의 중심인 굿우드 저택 인근의 얕은 언덕을 한 대씩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힐 클라임(hill climb) 이벤트다. 초기에는 하루 동안 소수의 초청자에게만 공개되었던 이 이벤트는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면서 규모가 점점 커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여러 브랜드가 모터스포츠를 주제로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인 만큼, 자동차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관련 럭셔리 브랜드의 참가와 후원도 갈수록 늘고 있다. 사전 예매를 통해 입장권을 사야 참석할 수 있는 이 행사를 찾는 사람은 이제 15만 명에 육박한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는 7월 12일부터 15일까지 역대 가장 큰 규모로 치러졌다. 포르셰 창립 70주년과 랜드로버 탄생 70주년이 겹친 덕분에 두 브랜드는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한 이벤트로 관람객을 즐겁게 했다. 포르셰는 굿우드 하우스 앞에 거대한 기념조형물을 세우고 첫 모델인 356 이전에 만들어진 시험용 차를 공개했다. 랜드로버는 1948년에 만들어진 시험제작차를 중심으로 클래식 시리즈 랜드로버 70대가 줄지어 행사장을 달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그 밖에 수많은 클래식 경주차와 스포츠카들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율주행 경주차인 로보레이스가 세계 최초로 힐 클라임 코스를 달린 것을 비롯해 페라리, 애스턴 마틴, 매클래런 등 유명 스포츠카 브랜드 최신 모델들과 전기 스포츠카인 니오 EP9도 나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행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부대행사로 열린 클래식 경주차 경매에서는 1960년대 F1 선수로 이름을 날린 짐 클라크가 탔던 애스턴 마틴 DB4 자가토가 유럽 자동차 경매 사상 영국차로서 가장 높은 1010만 파운드(약 150억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남겼다.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의 성공은 굿우드 리바이벌이라는 이벤트 탄생으로 이어졌다. 1998년부터 매년 9월 주말에 열리는 이 행사는 좀 더 본격적으로 과거의 모터스포츠를 재현한다. 굿우드 서킷에서 자동차 경주가 열린 1948년부터 1966년까지 실제 활약했던 경주차와 모터사이클이 직접 서킷을 달리며 경주한다. 20번째 행사가 열린 올해 9월 7일부터 9일까지 사흘 동안 시대와 차급에 따라 나누어 열린 16차례의 경주마다 뜨거운 경쟁이 펼쳐졌다. 참가하는 차들 모두 역사적 의미가 있는 만큼 대부분 가치가 높고 값이 비싸지만, 많은 참가자가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자신이 소유한 차를 직접 몰고 출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대 유명 선수들은 물론 현역 드라이버와 자동차 애호가로 알려진 유명인들도 참가해 경주차를 몰기도 한다.

클래식 카 모습을 한 페달 카로 치러지는 경주는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모터스포츠 이벤트다.
재미있는 것은 경주차를 모는 운전자들은 물론이고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경주차나 모터사이클이 활약하던 시절의 옷을 입고 현장을 찾는다는 점이다. 주최 측은 경주가 열리는 서킷 주변에 현대적인 차들이 보이지 않도록 통제하고,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페달 카(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네 바퀴 차) 경주에 쓰이는 차들도 1950, 60년대 차들처럼 겉모습을 꾸며놓았다. 앰뷸런스와 소방차 등 긴급차를 빼면 행사장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1950, 6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겨 굿우드 전체가 마치 타임캡슐을 연 것처럼 과거로 돌아간다.

클래식 모터사이클 경주에도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는다.
클래식 모터스포츠 이벤트의 인기는 오랜 자동차 역사에서 모터스포츠가 큰 역할을 해 왔음을 증명할 뿐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마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터스포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시절 추억을 떠올릴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은 지금 즐기고 있는 모터스포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클래식 카와 모터스포츠 모두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한국에서 이 같은 이벤트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여력이 있다면 내년에 열릴 행사 일정이 이미 확정되었으니 웹사이트를 통해 미리 입장권을 구매해 현장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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