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반기업 정서 파고드는 엘리엇

배극인 산업1부장

입력 2018-09-10 03:00 수정 2018-09-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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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1부장
현대자동차그룹이 올해 3월 추진한 지배구조 개편안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순환출자 해소가 첫 번째다. ‘모비스→현대차→기아차→모비스’로 이어진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지배구조를 ‘대주주→모비스→현대차→기아차’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다음은 일감 몰아주기 해소다. 물류유통기업으로 국내 일감이 많은 현대글로비스의 대주주 지분 29.9%를 모두 기아차에 넘겨 규제 대상에서 아예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시 국내 일감이 많은 모비스의 모듈사업과 AS부품사업을 떼내 대주주 지분이 사라진 글로비스로 넘기는 게 포인트다.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비스 영업이익의 약 80%를 차지하는 알짜 사업인 AS부문이 글로비스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현대차와 기아차, 모비스 지분을 갖고 있는데, 현대차 개편안대로라면 단기 차익을 극대화할 수 없다. 엘리엇이 모비스의 AS부문만 떼어내 자신이 지분을 보유한 현대차에 합병시키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먹튀’나 다름없는 엘리엇의 노골적인 요구에 현대차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엘리엇의 지분만 놓고 보면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지만,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가 엘리엇의 요구대로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반기업 정서 눈치 보기에 바쁜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엘리엇이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을 자신들과 의논하라며 도 넘은 경영 간섭에 계속 나서는 것도 이런 분위기에 자신만만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지배구조 개편을 완수하려면 엘리엇과의 타협점을 찾아야 하지만 쉽지 않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인 상장사 기준을 총수 일가 지분 30% 이상에서 20% 이상으로 넓히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글로비스도 곧 규제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현대차가 글로비스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 해소를 지배구조 개편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일감 몰아주기를 안 하면 그만이지 대주주 지분까지 처분해야 하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문제는 공정거래법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공정거래법은 23조의 2에서 부당 내부거래를 통해 대주주가 사익을 챙길 수 없도록 했다. 다만 부당 내부거래의 개념에 대해 ‘정상적인 거래… 조건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는 행위’라고 규정했을 뿐, ‘정상거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기업이 정상거래로 판단한 내부거래도 공정위가 문제 삼으면 대주주는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대주주들이 아예 지분을 정리해 형사 처벌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려는 이유다.

상호출자 및 순환출자가 금지된 상황에서 대주주가 상장사 지분을 20% 미만으로 낮추면 경영권 방어에도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상장사의 경우 이해관계가 얽힌 주주들이 많아 언제든지 경영권 분쟁에 휩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경영에 집중하기보다 경영권 분쟁에 자원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셈이다. 공정위가 대주주의 지분 매각만 독촉할 게 아니라, 정상거래 개념부터 정립해 경영 환경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줘야 하는 이유다.

엘리엇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자 주말에 만난 정부와 여권 인사들의 태도도 달라지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차등의결권을 도입해 투기펀드의 장난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면서도 이내 국민들의 반재벌, 반기업 정서를 거론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총수 일가들이 국민의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국민들의 일자리 터전이자 국부의 원천이라는 점도 진지하게 새겨볼 필요가 있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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