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주춧돌… 푸근한 정원… 소탈한 멋, 조선 선비 같네

유원모 기자

입력 2018-07-25 03:00 수정 2018-07-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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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산사를 가다]
<3> 유교 향취 짙게 밴 안동 봉정사




봉정사는 가파른 산지라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건물을 조밀하게 짓고,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는 등 효과적인 가람 배치를 자랑한다. 만세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 안동=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말해주오,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었다고.”

16일 경북 안동시 봉정사에 들어서자 퇴계 이황(1501∼1570)이 가장 먼저 반긴다. 사찰 입구 계곡에 있는 정자인 ‘명옥대(鳴玉臺)’에서 퇴계가 이 시를 남긴 것. 열여섯 살 퇴계가 이곳에서 3개월가량 머물며 공부를 하고, 놀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물이 떨어지는 곳’이란 뜻의 ‘낙수대(落水臺)’였지만 귀향 후 50년 만에 다시 찾은 퇴계가 ‘옥구슬 소리가 나는 정자’라는 이름으로 바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봉정사는 ‘선비의 고장’에 자리한 덕분에 불교뿐 아니라 유교의 색채도 짙게 배어 있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병산서원과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이 사찰과 가까우니 함께 둘러보면서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를 같이 즐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건물인 극락전. 안동=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본격적으로 사찰에 들어서면 2층 누각인 만세루를 마주한다. 누각의 주춧돌을 자세히 보면 자연석 그대로를 활용하고, 기둥 돌 아래쪽과 자연스럽게 접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그랭이’ 공법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했던 선조들의 숨은 코드인 셈이다.

만세루를 지나면 두 개의 주전(主殿) 중 하나인 대웅전(국보 제311호)이 정면에,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무량해회 건물이 양 옆에 위치한다. 조선 초 건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다포계 건물(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여러 개인 양식) 중 가장 오래된 대웅전에는 독특하게도 건물 전면에 툇마루가 설치돼 있다. 이날 동행한 명법 스님(문화재위원)은 “전통 한옥식 구조를 사찰에 적용해 산사(山寺)라는 지형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 것”이라며 “대부분 독립된 건물로 존재하는 ‘칠성각’이 대웅전 내부에 있는 등 봉정사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건축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영산암. 안동=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화엄강당 뒤편으로 이동하면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이 나타난다. 12세기에 지은 극락전은 주심포 양식과 맞배지붕 등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다포식, 팔작지붕을 갖춘 대웅전과 비교해서 보면 한국 전통 건축의 변천사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다.

봉정사에서 놓치면 아까운 곳이 있다.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200여 m를 올라가면 나타나는 영산암(靈山庵)이다. 19세기에 지은 이 암자는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마음을 바라보는 집’을 뜻하는 ‘관심당(觀心堂)’, ‘꽃비가 내리는 누각’의 ‘우화루(雨花樓)’ 등 예쁜 이름을 가진 건물에 둘러싸인 미음(ㅁ)자 구조다.

내부 정원에는 봉선화와 옥잠화처럼 수수한 꽃들이 주를 이룬다. 화려하기보다는 푸근한 매력을 선사하는 한국 정원의 미학을 대표하는 곳이다. 1999년 4월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찾기도 했다. 명법 스님은 “조선의 선비와 한국 전통 불교는 소탈하며 끊임없이 도를 추구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 매력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봉정사”라고 말했다.
 
안동=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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