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폭탄’에 무너진 공론장… 누리꾼들 포털서 짐싼다

김자현기자 , 김동혁기자

입력 2018-05-01 03:00 수정 2018-05-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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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집단 여론조작 여전히 횡행


‘화력 지원 부탁드립니다.’

지난달 21일 오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개설된 한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이 카페는 회원 3000여 명 대부분이 남성이다. 게시자는 글과 함께 한 기사의 인터넷접속주소(URL)를 남겼다. 해당 기사에 비판 댓글을 올리거나 해당 댓글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기사 URL은 화력을 집중시킬 ‘공격 좌표’인 셈이다.

타깃이 된 기사는 페미니즘 관련 책을 펴낸 교사 A 씨의 인터뷰였다. A 씨는 기사에서 “남성들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청이 올라오자 회원들의 지원이 현실로 나타났다. 불과 30분 만에 비판 댓글이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댓글 1만8796개(4월 30일 기준) 중 ‘페미니즘은 변형된 공산주의’(추천 1만3424개) ‘페미니즘은 지능(이 떨어져서 믿는) 문제’(추천 3597개) 등의 댓글이 상위권을 장악했다.


○ 놀이와 문화가 된 ‘온라인 여론 조작’

최근 ‘드루킹’(온라인 닉네임) 김동원 씨(49·구속 기소) 일당이 벌인 댓글 여론 조작 사건을 계기로 공공연하게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여론 왜곡 문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집단을 제물삼아 이른바 ‘좌표’를 찍어 공격하는 걸 마치 놀이나 문화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배우 유아인 씨(32)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번 달 중순 영화 ‘버닝’의 개봉을 앞두고 주인공인 유 씨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다룬 인터뷰 기사마다 악플이 빠지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유 씨가 자신을 비난하는 한 누리꾼의 글을 언급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비난한 것이 화근이었다.

급기야 여성 회원 중심의 한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고 보수 성향 커뮤니티에서 추앙받는 배우’로 유 씨를 규정지었다. 이들은 유 씨가 캐스팅된 영화 버닝을 타깃으로 삼고 “유아인의 신작영화 평점 때리러(테러하러) 가자”고 공격했다. 하루에 500개가 넘는 악플과 ‘1점짜리’ 평점이 줄을 이었다. ‘영화가 망하면 유아인이 정신 차릴까?’ ‘이 영화 절대 보면 안 돼’와 같은 글도 올라왔다. 반대로 남성 회원 중심의 다른 커뮤니티가 맞대응에 나서면서 영화 평점은 널뛰기를 반복했다.


○ ‘온라인 젠트리피케이션’ 택한 시민들

댓글 공격과 평점 테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일상이 되면서 평범한 누리꾼조차 여론 조작에 둔감해지는 게 현실이다. 급기야 온라인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상실한 포털 공간에서 탈출하는 누리꾼이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온라인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개발에 따른 땅값 상승으로 원주민이 떠나는 걸 말한다.

회원이 40만 명에 달하는 네이버의 한 부동산 카페 운영진은 최근 열성 회원들의 활동이 뜸해져 고민이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관련 게시물마다 찬반 의견이 종종 감정싸움으로 치닫는 탓이다. 한 회원은 “한바탕 갈등 후에는 좋은 정보와 글을 올리던 회원이 하나둘 떠난다. 다른 카페 회원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몰려와 건전한 여론 형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일부 누리꾼은 포털 운영 방침과 관련 없는 비공개 커뮤니티나 소수의 오프라인 모임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회사원 박모 씨(26·여)는 “아무래도 믿을 만한 정보와 균형 잡힌 주장이 오가는 공간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포털사이트가 여론의 왜곡을 막는 장치를 확보하지 못하면 누리꾼들은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최근 드루킹 사태는 포털이 여론의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시험대에 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자현 zion37@donga.com·김동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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