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느린 걸음으로 엿본 ‘통영의 속살’

이설 기자

입력 2018-04-14 03:00 수정 2018-04-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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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동네서점 ‘봄날의 책방’ 강용상 씨의 ‘어반추리(Urban+Country) 라이프’

어느 날 아내가 쓰러졌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퍼뜩 ‘일-야근-외식’의 쳇바퀴에 몸이 시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길로 경남 통영으로 내려왔다. 딱 1년만 속없이 놀고먹으며 건강을 다스리자는 심산이었다.

1년이 2년이 되고… 2018년 봄 어쩌다 9년 차 통영 주민이 됐다. 이따금 극한의 도시 생활이 그립지만 통영을 만나 행운이다 싶다. 이곳에선 도시와 시골을 반반 섞은 ‘어반추리 라이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영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용상 씨(오른쪽). 통영=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뒤돌아서면 그리워 끙끙대는 ‘통영앓이’를 하게 된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통비어천가(통영+용비어천가)’가 이리 요란할까. 통영의 봄날엔 정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걸까. 아침 공기마저 훈훈해진 7일 아침 통영으로 향했다. 차로 4시간을 달리자 통영 입성을 알리는 간판이 보였다. 창밖으로 시리게 푸른 바다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벚꽃은 만개했고 땅에는 핏빛 동백꽃잎이 수북했다.

날은 좋지 않았다. 미세먼지에 황사가 겹쳤고 바람도 거셌다. 활짝 핀 벚나무 꽃잎이 바람에 실려 어지럽게 흩날렸다. 꿈인가 싶은 꽃비 사이로 패딩 조끼를 걸친 남자가 걷는 듯 뛰는 듯 다가왔다. 경남 통영시 봉수1길에서 ‘봄날의 책방’을 운영하는 강용상 씨(49)다.

“통영은 봄이 유명하지만 사실 가을이 가장 예뻐요. 바다는 시리게 푸르고 산은 ‘초록초록’하고. 모든 게 제 색을 힘껏 보여주거든요. 먹는 건 1, 2월이 제철이죠.”

서울 토박이인 강 씨는 2010년 아내와 함께 통영에 정착했다. 최근 그의 집과 사무실이 있는 봉수1길에는 슬로 라이프를 꿈꾸며 둥지를 튼 외지인이 늘었다. 5, 6월은 일본 홋카이도에서, 겨울은 태국 치앙마이에서 보내던 이웃도 있고, 국내외에서 스노보드 사진을 찍던 이웃도 있다. 통영이 제주에 이어 느리게 살기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왜 통영일까. 바로 답을 듣기보단 일단 함께 걷기로 했다. 이곳저곳 장소를 넘나들다 보면 통영에 얽힌 그의 이야기도 스르륵 봉인 해제될 것 같았다.

나지막한 봉수1길 언덕에 자리한 통영시민의 문화사랑방 같은 ‘봄날의 책방’. 통영=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통영에 내려온 후로 강 씨는 자주 걷는다. 서울에선 아니었다. 각각 건축과 홍보 일을 하던 남편과 아내는 일중독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주말에나 겨우 한강변을 산책할 짬이 났다. 이곳에선 걷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걷는다. 시공간의 밀도가 높지 않고 어디를 향하든 기가 막힌 풍경에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부가 운영하는 출판사와 서점은 통영의 대표 명소인 전혁림미술관과 이웃해 있다. 그는 올해 봉숫길골목상인회 회장을 맡았다. 통영 생활 9년 차, 반쯤 통영 사람이 된 셈이다. 통영의 매력을 묻자 강 씨는 잠시 정색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멋쩍게 입을 열었다. “예전엔 통영의 모든 게 신선했어요. ‘통영을 잘 아는 이방인’이라는 점이 저의 비교우위였죠. 한데 오늘은 ‘통영에 특별한 게 있나’ 싶어요. 이곳이 익숙해졌나 봐요.”

‘초심’을 떠올리려 애쓰던 그가 기억을 꺼냈다. 부동산중개업소를 찾은 부부는 바다가 잘 보이는 아파트를 찾아달라고 했다. 중개업소 대표는 “나가면 천지가 바다인데 굳이 흐릿한 창문 너머로 거실에서 바다를 봐야 하느냐”며 말렸다. 끝내 ‘바다 전망’을 고집한 부부는 바닷가 아파트에 입성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코빼기도 안 보이는 곳으로 이사했다. 기를 쓰고 피해도 바다를 볼 수밖에 없는 곳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그의 단골 산책로는 책방에서 충무교를 건너 강구안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느린 걸음으로 딱 1시간이 걸린다.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미륵도에서 뭍으로 가려면 충무교 통영대교 해저터널 중 한 곳을 통해야 한다. 강 씨는 앞장서서 충무교를 건넌 다음 오른편 골목으로 빠졌다.

냉큼 뒤를 쫓아가니 실핏줄 같은 골목이 뻗어 있었다. 간신히 지날 만큼 좁다랗다. 시간이 멈춘 듯한 뒷골목 풍경에 감탄하다 보니 슬그머니 드는 생각. “이런 골목은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지 않나요?” 기자의 질문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다와 만났다 헤어졌다 하잖아요. 그게 포인트죠.”

정말 그랬다.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 해안길로 나가자 다시 바다가 나왔다. 해안길 이면도로에서 적산가옥과 나전칠기공방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또 바다가 인사했다. 그런데 바다가 다르다. 청록색 파란색 남색 노란색…. 황홀한 색의 축제가 펼쳐졌다.

“처음 통영 바다를 은빛 금빛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의아했는데 이젠 압니다. 진짜 은빛바다 황금빛바다가 있다는 걸요. 햇빛의 각도와 수온에 따라 바다색이 달리 보이는 겁니다.”

바다 위 반짝이는 물고기 비늘 같은 걸 ‘윤슬’이라고 한다. 눈이 부셨다. 강 씨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해뜰 무렵의 윤슬. 다홍 보라 노랑이 섞인 오묘한 빛깔이 예술이란다. “눈으로 봐야 자연이 자아내는 신비로운 색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해뜰 무렵에 꼭 바다에 나가 보세요.”

길목마다 음악이 들려올 것만 같은 도천동의 ‘윤이상거리’. 통영=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걷다 보니 반듯하고 소담한 공원이 나왔다. 통영 출신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1917∼1995)을 기리기 위한 윤이상기념공원이다. 지난해까지 이곳은 도천테마파크로 불렸다. 이름이 바뀐 사정은 아프고 복잡하다. 올해 통영은 ‘윤이상 이슈’로 속을 끓였다. 독일에 묻힌 그의 유해 이장을 놓고 전국적으로 여론이 갈린 것.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올 2월 고향땅을 밟았고, 지금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 보세요. 죄다 윤이상, 유치환이지요? 통영의 웬만한 교가는 모두 선생들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강 씨가 이끄는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엔 음표 그림이, 벽면엔 교가가 가득했다. 대부분 교가가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이었다. 두 거장이 어깨동무를 하고 골목 귀퉁이에서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들뿐 아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사랑하는 여인 이영도와 20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청마 유치환, 그의 형인 극작가 유치진, 한국의 피카소 전혁림, 미국에서 더 유명한 소설가 김용익 등이 통영 출신이다. 백석 이중섭 등 이곳에서 영감을 받은 예인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였다.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12공방 장인들이 모여 살았다.

400년 역사를 지닌 국가무형문화재 추영호 소반장의 소목공방. 최근 철거 위기를 맞은 그의 공방을 살리기 위해 통영시민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통영=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통영의 ‘컨추리’가 하늘이 내린 자연환경이라면, ‘어반’은 예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부터 통영 장인의 나전칠기와 소반은 바라만 봐도 마음에 바람이 이는 명품이었다. 추영호 소반장의 공방엔 과거 장인들의 숨결이 그대로 깃들어 있다.

2평 남짓한 그의 공방은 박효자길의 윤이상 생가와 나란히 붙어 있다. 한데 공방 앞뒤로 길이 뚝 끊겼다. 강 씨는 “새 길을 내기 위해 시에서 공방을 허물려고 한다. 최근 토목행정으로 후퇴하는 시의 행보가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문학계 큰 별들은 통영 문화력의 주춧돌이다. 최근 이들의 흔적을 찾아 성지 순례하듯 통영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별은 졌지만 통영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은 주옥같은 문장으로 남았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빛은 맑고 푸르다.’(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에서)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 위로 보릿빛 아래로 물빛 아울리기 이야말로 금수강산 중에서도 모란꽃 한 송이다. 햇빛 바르기 눈이 부시고 공기가 향기롭기 모세관마다 스미어든다.’(정지용 ‘통영5’ 에서)

조선업이 쇠락한 이후 통영은 관광지로 이름을 알렸다.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다니던 관광객들은 이제 뒷골목을 누비며 작은 이야기를 찾는다. 어느새 다다른 강구안 뒷골목 카페거리는 이야기의 성지 격이다. 과거 유치환 박경리 전혁림 윤이상 김상옥이 새벽까지 이 골목에서 시대와 예술을 논했다. 요즘 통영 문화인들의 아지트인 ‘커피로스터스 수다’의 윤덕현 대표(42)는 “통영은 다시 한번 도약할 준비를 하는 중이다. 조선소 자리에 문화·관광·레저를 결합한 복합시설을 공모하고 있다”고 했다.

통영 여행의 화룡점정은 발개로의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다. 강풍에 창밖의 바다가 뒤뚱거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미륵산 정상에 올랐다. 올록볼록 여성스러운 통영의 지형, 아기자기한 어항들, 구도심, 크고 작은 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통영은 자연과 도심을 동시에 품고 있어요. 섬에선 자연의 원시미를, 강구안 도심에선 도회적인 기운을,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정갈한 문화의 기운을 느낄 수 있죠.”

오후 9시 반, 큰발개1길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리는 ‘2018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일본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눈을 감은 채 윤이상의 ‘바라’를 연주했다. 외국인, 외지인, 통영 주민이 객석에서 가만히 귀를 열었다. 윤이상이 그린 음표들이 미도리의 활 끝에서 조용하고도 격렬하게 뛰놀았다. 어느새 통영의 달뜬 밤이 저물었다.

“통영에는 통영만의 분위기가 있어요. 평온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소박한 듯 화려하죠. 저도 아직 통영의 속살을 다 보진 못했어요. 보여줄 듯 말 듯한 신비함도 통영의 매력입니다.”
 
통영=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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