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법꾸라지 채용 청탁자’…公기관 채용청탁자 처벌 11년간 1명뿐

배준우 기자 , 권기범 기자 , 김동혁 기자 , 조응형 기자

입력 2018-03-22 03:00 수정 2018-03-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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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등 26명 재판회부 안돼… 청탁이행 처벌은 문재인 정부 들어 강화

채용 비리의 시작은 부정한 청탁이다. 그러나 청탁 당사자는 번번이 법의 심판을 피했다. 그 대신 청탁을 실행한 인사들에게 처벌이 집중됐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청탁을 받고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에게 과거보다 무거운 처벌이 내려지고 있다.

본보는 2007년부터 올해 3월까지 공공기관 채용 비리 사건 10건의 판결문 23개를 입수해 분석했다. 사건에 연루된 청탁자는 27명. 전현직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시의원 등 정치인이 9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재판에 넘겨져 처벌을 받은 청탁자는 산하 기관에 아들을 입사시키려고 인사담당자에게 문제지를 유출토록 압력을 행사한 당시 지식경제부 공무원 1명 뿐이다.

반면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열린 채용 비리 5건의 재판에서 청탁을 받고 실행한 피고들에게는 전원 실형이 선고됐다. 금융감독원 부원장을 차례로 지낸 김수일(56) 이상구 씨(56)에게는 지난해 9월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10개월이 선고됐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을 지낸 박철규 씨(61) 등 다른 청탁 실행자도 징역 10개월에서 길게는 4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전 5건의 경우 청탁 실행자에게 실형 선고가 내려진 적은 없다. 검찰 관계자는 21일 “사기업도 공개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신뢰를 배반할 경우 엄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중국어 잘한다던데” 모호한 부탁… 채용 청탁자, 법망 피해가 ▼

‘채용비리 판결’로 본 실태

부정 채용을 청탁하는 사람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 사이에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표현은 모호하고, 대화는 은밀하다. 특정 지원자를 뽑으라는 노골적인 요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07년 이후 주요 채용 비리 사건 10건의 판결문 23개와 관련 공소장을 분석한 결과다. 박철규 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인사담당자에게 이름 세 글자가 적힌 포스트잇을 건네며 넌지시 말했다.

“응시자 중에 ○○○이 있는데, 중국에서 대학을 나와 중국어를 잘한다더라.”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지원자 명단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일부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조선시대 임금이 관료를 뽑을 때 ‘낙점(落點)’ 표시를 한 것과 비슷하다. 한 공공기관 인사담당자는 “합격자 발표가 한참 남았는데 사내외 고위 인사로부터 ‘○○○ 합격했는지 알 수 있느냐’는 연락이 자주 온다. 이건 사실상 합격시키라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 모호하고 은밀한 ‘청탁 언어’

채용 비리 사건 판결문에 등장한 청탁자 27명 중 1명을 뺀 26명이 기소조차 되지 않은 비결은 바로 이런 ‘전략적 모호성’ 덕분이다. 채용 담당자는 특정인을 합격시키기 위해 전산이나 서류를 조작하면 물증이 남아 처벌받는다. 하지만 청탁자의 언질은 증거가 남지 않는다. 실행한 사람의 입에서 청탁자 이름이 나오는 경우도 드물다.

설사 청탁자가 드러나도 “단지 참고만 하라는 취지였다”고 발을 빼면 속수무책이다. 청탁 내용이 담긴 음성 녹취 파일이 법원에 제출된 적도 있지만 특정인을 뽑으라는 명시적 표현이 담겨 있지 않는 한 증거로 인정되기 어렵다. 심지어 청탁 당사자가 “내가 압력을 넣었다”고 자백까지 했지만 재판부가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각한 사례도 있다. 채용 비리를 수사했던 한 검찰 관계자는 “청탁과 추천의 경계가 모호해 부정한 청탁이 이뤄졌다는 점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채용 비리에 적용되는 법률은 형법상 업무방해죄다. 공정하고 자유롭게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 기업의 업무를 방해한 죄로 처벌되는 것이다. 청탁한 사람과 이를 실행한 사람 모두 업무방해의 공범이다. 하지만 증거가 남는 실행자만 처벌받고 청탁자는 번번이 법망을 피해갔다.

청탁자가 처벌받은 사례는 과거 지식경제부 공무원이었던 정모 씨(60)가 유일하다. 정 씨는 산하 기관에 미국 시민권자인 아들을 취업시키려고 전형 기준에 해외유학 경력을 추가하도록 하는 한편 시험문제까지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해당 기관 담당자가 거부하자 “너 하나 정도는 날려버릴 수 있다”고 협박했다. 정 씨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가 2016년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정 씨처럼 노골적으로 청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청탁의 개념이 모호한 게 사실이다.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결정적 물증이 없는 한 보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무방해죄 자체에도 맹점이 있다. 죄가 성립하려면 청탁한 사람이나 청탁을 받은 사람이 인사담당자 모르게 부정 채용을 진행한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사담당자까지 포함해 서로 협의 후 특정인을 채용했다면 죄가 되기 어렵다. 업무를 방해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검찰도 청탁자 수사에 소극적이다. 우리은행 채용 비리를 수사 중인 서울북부지검은 채용 청탁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상구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과 전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에 대해 한 차례 참고인 조사에 그쳤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채용 비리를 수사했던 서울중앙지검도 청탁자로 지목된 전 공군참모총장 최모 씨와 방송사 간부를 기소하지 않았다.

처벌 가능성이 낮으니 정치인 등 유력 인사는 별다른 위험부담 없이 채용 청탁을 남발한다. 결국 힘 있는 인사와 줄이 닿은 사람만 특혜를 받아 채용되고 절차를 지킨 평범한 사람은 뒷전으로 밀리는 불공정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 원인은 낙하산 인사 ‘보은 관행’

공공기관 채용 비리는 정치권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고위 간부들이 직원 채용을 보은의 수단으로 악용하기 때문이다. 한 공공기관 고위 간부는 “권력자의 도움으로 자리를 얻은 사람이 도와준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 공기업 상무는 “인사부장으로 있을 때 이사장이 청와대나 국회의원의 청탁을 받고 ‘누구를 뽑으라’고 여러 번 지시를 내렸다. 한 번 들어주면 계속 응해야 할 것 같아 번번이 거절했더니 승진이 한참 늦어졌다”고 털어놨다.

채용 비리 판결문에 거론된 청탁자 27명 중 9명은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 시의원 등 정치인들이었다. 이들 중 처벌받은 사례는 없다. 자유한국당 최경환 의원이 중소기업진흥공단 채용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을 뿐이다.

채용 비리는 보통 상급자가 아랫사람에게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검찰에 따르면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연임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부하 간부들의 자녀가 채용되도록 도운 혐의를 받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청탁을 들어준 간부들이 요직으로 발탁되다 보니 다른 간부들도 채용 청탁에 응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배준우 jjoonn@donga.com·권기범 기자·김동혁 hack@donga.com·조응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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