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 영상, 피카소 그림 속 ‘비밀’ 꿰뚫다

동아일보

입력 2018-03-02 03:00:00 수정 2018-03-02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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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웅크린 거지’ 밑 또다른 풍경화, 오른팔 그리려 했던 붓터치까지
휴대용 장비 이용해 모두 찾아내… 세계 미술관 찾아다니며 분석 가능


연구자들이 휴대용 X선 형광 분석 기기(MA-XRF)를 이용해 피카소가 1902년 그린 ’웅크린 거지’를 분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사진 출처 노스웨스턴대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에드가르 드가…. 미술계 거장들은 생전에 어떤 고민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을까.

이런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미술 작품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X선 영상으로 회화나 조각 작품을 분석해 숨겨진 단면을 꿰뚫어 보거나 성분을 분석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과정을 밝히는 게 이들의 임무다.

지난달 17일(현지 시간) 미국 오스틴에서 열린 ‘2018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총회’. 노스웨스턴대-시카고예술연구소 과학적예술연구센터(NU-ACCESS) 연구진은 피카소의 1902년 작인 ‘웅크린 거지(La Mis´ereuse accroupie)’를 다양한 과학기법으로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온타리오 아트 갤러리,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등도 참여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웅크린 거지 뒤에 피카소가 처음 그렸던 그림은 빵을 든 여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그 뒤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라베린트 도르타 공원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작가 풍경화도 깔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베린트 도르타 공원은 당대 화가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웅크린 거지는 피카소가 우울증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청색 시기(Blue Period·1901∼1904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시기에 그려진 다른 회화 작품들처럼 청색 계열의 단순한 톤으로 그려졌다. 자신의 그림이 아닌 풍경화 위에 덧대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은 피카소가 단순히 재료값을 아끼기 위해 캔버스를 재활용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풍경화 속 산등성이가 거지의 굽은 등과 옷자락이 됐다는 점이나 두 그림의 색상 구성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풍경화가 피카소에게 영감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①은 웅크린 거지를 일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다. ② ③ 은 MA-XRF로 각각 납과 바륨 성분을 검출해 얻은 영상으로, 숨겨져 있던 손에 빵을 든 오른팔과 풍경화(시계 반대 방향으로 90도 회전 시)가 드러난 모습이다. 사진 출처 노스웨스턴대
웅크린 거지 뒤에 풍경화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건 1992년 X선 영상 촬영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이 풍경화가 피카소 본인 그림인지, 다른 사람 그림인지 알기 어려웠다. 어떤 물감으로 그려졌고 피카소가 덧대어 그린 부분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오른팔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진은 우선 ‘초분광 적외선 반사복사법’을 이용해 웅크린 거지의 구석구석을 촬영했다. 여러 파장의 빛을 쪼인 뒤 그림에 반사돼 돌아오는 빛으로 영상화하는 방법이다. 물감 성분에 따라 투과, 반사시키는 빛의 파장이 다른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숨겨진 그림 면면의 ‘스냅숏’을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연구진은 가려져 있었던 피카소의 붓 터치를 발견했고 ‘매크로 X선 형광 분석법(MA-XRF)’을 활용해 추가 분석했다.

MA-XRF를 이용하면 그림 안쪽에 있는 물감 성분과 종류, 색상 등을 알 수 있다. 성분별로 영상을 분석한 결과 철과 크롬 성분을 검출한 영상에서는 기존의 웅크린 거지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철 성분이 많은 프러시안 블루 색상과 크롬이 많은 녹색 물감은 피카소가 청색 시기에 자주 썼던 물감이다. 반면 납과 카드뮴, 아연 성분이 검출된 영상에서는 그림에서 빵으로 추정되는 둥근 물체를 손에 들고 있는 오른팔의 모습이 나타났다. 녹색 물감에서 많이 나오는 바륨 성분은 풍경화의 풀숲에서만 높게 나왔다.

이번 연구를 이끈 마크 월턴 NU-ACCESS 공동센터장은 “피카소가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빵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옷으로 덮은 것”이라며 “빵을 든 모습은 기독교나 천주교의 성찬식 장면을 연상시킬 수 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이 특정 종교를 상징하는 걸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화의 경우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고치는 일이 흔하다. 일례로 19세기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 ‘만종(L‘Ang´elus)’에 등장하는 감자 바구니에는 원래 죽은 아기가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앞으로는 과거에 그려진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데 과학적인 분석 기법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술사에 던져진 여러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다. 월턴 센터장은 “그림 뒤에 가려진 여러 층의 붓 터치를 꿰뚫어 보면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이런 흔적은 작품은 물론이고 화가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온타리오 아트 갤러리의 케네스 브러멀 큐레이터도 “작가나 시대에 따라 사용하는 물감의 성분이 조금씩 다르다. 물감 정보는 누가 언제 어떤 부분을 그렸는지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에 사용된 분석 기기들은 모두 휴대용 장비였다. 같은 장비를 이용해 최근 피카소가 만든 39개의 동상과 11개의 금속판화를 분석한 프란체스카 카사디오 시카고예술연구소 박사는 “이전까지는 미술 작품을 분석하려면 작품을 연구실로 옮겨야 했지만 분석 기기가 소형화되면서 세계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연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휴대용 MA-XRF를 이용한 분석 비용은 1000달러(약 108만 원) 수준으로 기존에 작품을 옮기는 데만 수백만 원이 들어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훨씬 경제적이다.
 
송경은 동아사이언스 기자 kyunge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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