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교육에 빠진 참치왕… “장학사업도 ‘과녁’ 꼭 확인해야”

김창덕기자

입력 2017-12-26 03:00 수정 2017-12-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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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동원산업 집무실에서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뒤로 보이는 게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거꾸로 세계지도’다. 김 회장은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골프를 즐길 정도로 활동적이다. 그는 76세 때 75타를 쳐 ‘에이지 브레이크’(나이보다 적은 타수)를 작성하기도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대양으로 향하는 원양어선의 선장이 된 건 1963년, 그가 스물여덟이었을 때다. 서른넷이 된 1969년에는 회사를 세웠다. 창업이념이 독특했다.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 실현.’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세계 최빈국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무렵 기업들은 ‘외화벌이’의 첨병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런데 30대 중반의 이 청년은 사회적 책임을 기업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사회에 기여할 새로운 방법에 목말라하고 있다. 23일 그를 만난 장소는 이런 삶의 궤적과 정확히 맞닿은 곳이었다.

‘인성교육’에 몰입하다

서울 서초구의 동원산업 본사 20층 대강당.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82)이 천천히 걸어 연단에 올랐다. 동원육영재단 ‘자양 라이프 아카데미’ 2기에 참가한 대학생 40명이 김 회장을 박수로 반겼다. 원고는 없었다.

“앞으로 9개월 동안 여러분은 아주 고된 교육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수료할 무렵 아마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는 생각을 가질 거라 믿습니다.”

자양 라이프 아카데미는 동원육영재단이 3월 만든 대학생 전인교육 프로그램이다. 교육의 핵심은 ‘인성’이다. 과학, 인문학,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토론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난달 1기 수료자 41명을 배출한 데 이어 이날 2기 입학식이 열린 것이다. 토요일마다 하루 종일 교육이 이어지는데 김 회장은 두 번에 한 번꼴로 교육을 참관한다. 학생들과 인근의 양재천변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선배’로서 조언하는 것도 즐긴다고 한다.

본보 인터뷰는 입학식 공식 일정이 끝난 뒤 그의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역시 인성이었다. 김 회장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며) “지식은 여기 다 있다. 하지만 지식은 인성을 만나야 지성이 되고, 그래야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동원산업 설립 10년 만인 1979년 동원육영재단을 세웠다. 창업이념인 ‘사회정의 실현’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게 이때부터다. 첫해 14명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재단 장학금을 받은 중고교생과 대학생이 6000명이 넘는다. 방하남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준보 전 대구고검장, 김영섭 부경대 총장 등이 이 재단 장학생들이다.

김 회장은 청년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대학을 찾아가 그의 교육관을 실현할 방법을 두루두루 논의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라이프 아카데미다.

“장학금만 주면 가장 편하긴 하죠. 하지만 나는 경영자니까 돈을 쓰더라도 가치 있는 곳에 쓰려고 합니다. 재단 직원들에게도 활을 쏘았으면 과녁에 제대로 맞는지 꼭 확인을 하라고 하거든요.”

라이프 아카데미는 동원육영재단이 직접 운영하는 자양 외에도 연세대, 조선대, 부경대가 각각 재단 지원을 받아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특히 올해 1학년 120명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 연세대는 내년 240명으로 확대한다.

자양 라이프 아카데미는 참가 학생 중 희망자들에게 경남 창원의 동원 참치캔 공장에서 직접 일할 기회를 준다. 인성이란 결국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라는 김 회장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두 아들에 대한 경영수업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맏아들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54)은 대학 4학년 때 북태평양의 명태잡이 원양어선을 탔다. 둘째 아들인 김남정 동원엔터프라이즈 부회장(44)은 대학 졸업 후 참치 제조공장 생산직원과 청량리 지역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김 회장은 “누군가가 하는 일을 해보지 않고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어렵다. 우리 청년들도 그런 경험을 통해 남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한다”고 했다.


씨앗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왜 이리도 인성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는 걸까.

김 회장은 “국민의 교육과 지식수준은 한층 높아졌고 생활은 편리해졌는데 행복도는 더 낮아지고 사회는 혼란스럽다”고 전제했다. 그 원인은 “지식들이 불완전연소하면서 엉뚱하게 발생하는 갈등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제대로 된 교육시스템으로 지식을 완전연소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그의 역할이라고 했다.

“많은 지식인이 자기 위주로만 지식을 활용하고 있어요. 지성인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겁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죠.”

김 회장은 인터뷰를 하던 중 갑자기 메모지를 꺼내 들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 ‘和’(화)를 썼다. 그 옆에 ‘Q’라는 글자도 이어 썼다. 옥편에 보면 두 글자 모두 화합을 뜻하는 글자로 나오지만 우리는 첫 번째 한자만 쓰고 있다. 김 회장은 “입구(口) 변이 벼화(禾) 변의 오른쪽에 있건 왼쪽에 있건 뜻은 똑같다. 서로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사람들이 서로 분열할 일은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인으로서 정치, 사회 얘기를 꺼내는 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도 어떤 점이 아쉽냐고 재차 묻자 갑자기 손자 얘기를 꺼낸다.

“손자가 초등학교 학생회장에 출마한다고 선거 운동 연설을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놈이 꼭 국회의원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학교 수업을 줄이겠다느니, 학생들의 복지를 늘리겠다느니. 아예 학교를 다 바꾸겠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정치인들이 지키지도 못 할 공약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이런 걸 “진정성이 없는 거래”라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불만이 생기고, 그런 불만이 쌓여 비난과 분열이 커진다는 게 그의 논리다.

김 회장은 3월 라이프 아카데미 출범을 축하하는 글에 이렇게 썼다.

“서로 돕고 협동하여 살기 좋고 아름다운 나라가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력이나마 교육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 보고자 한다. 설령 당장엔 성과가 미미할지라도 후일을 위해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라이프 아카데미를 개설한다.”


“30대 그룹엔 들어가고 싶지 않아”

김 회장은 대학 졸업 직후 무작정 한 원양어선 선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미 선원 모집이 끝난 뒤라 사정 끝에 무급으로 배에 올랐다. 그런 도전적 경험이 국내 최대 수산회사를 일구는 자양분이 됐다. 동원그룹은 지난해 기준 자산 8조2000억 원의 재계 37위 기업이다. 2008년 6월 미국 1위 참치캔 브랜드인 스타키스트를 3억6300만 달러(약 3900억 원)에 인수하면서 글로벌 시장에도 적극 진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동부익스프레스를 4200억 원에 사들이는 등 최근까지도 공격적 기업 인수합병(M&A) 행보를 이어왔다.

김 회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왔다.

“회사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30대 그룹) 데는 안 들어갔으면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성장을 멈추겠다는 뜻인가. 이유는 외부 환경에 있었다.

“기업이 너무 크면 외부에서 기대하는 게 많아지죠.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일단 욕을 하고 봅니다. 수산 분야 1위인 동원에도 언젠가부터 ‘자이언트’라는 수식어를 붙여 견제하더군요. 한국에서 삼성이 미움을 받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현재 공정자산 규모 10조 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31곳이다. 대기업이 되면 곧바로 수많은 규제에 포위되고 부정적 시선이 쏟아진다. 김 회장은 그런 부담을 스포츠에 빗대 말했다.

“운동장에서 세계 선수들과 경주를 한다고 칩시다. 0.1초라도 기록을 줄이는 것 외에 뭐가 중요합니까. 자기가 관중에게 손을 흔들며 한눈을 팔아도 문제지만 주변에서 그 선수를 방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심화하고 있는 반기업 정서에 대해서는 또렷이 의견을 밝혔다.

“반기업 정서는 우선 기업의 잘못이 크죠. 하지만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 평가가 필요합니다.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결국은 기업 경쟁력을 키워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 회장은 2000년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라는 책을 냈다. 그의 집무실을 포함해 동원산업 본사 곳곳에는 ‘거꾸로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김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부두”라고 했다. 한국도 네덜란드 로테르담 같은 세계적 항구도시를 가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니 아쉬움도 크다. 김 회장은 “지정학적으로는 해양강국이 될 자질이 충분한데 통관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스스로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저성장 기조에 빠진 한국 경제가 다시 활력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고유기술로 성장하는 중소기업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합니다.” 김 회장의 충고는 너무 당연하기에 더 묵직하게 들렸다.

김 회장은 인터뷰가 마무리되자 곧바로 20층 강당으로 향했다. 자양 라이프 아카데미 오전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날 점심식사 장소는 구내식당이었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는 그곳에서 아카데미 운영진과 함께였다. 손주뻘 학생들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지어 보인 그의 미소는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환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김재철은 누구 ::

△1935년 전남 강진군 출생
△1958년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졸업
△1963년 동화선단 선장
△1969년 동원산업 설립
△1979년 동원육영재단 설립
△1985∼1991년 초대 한국수산회장
△1989년 동원그룹 회장 취임
△1999∼2006년 한국무역협회장
△2001∼2002년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2006∼2007년 ‘2012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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