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 가난한 화가 구제하다가 ‘40억대 컬렉션’ 대박

최고야기자

입력 2017-10-28 03:00 수정 2017-10-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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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화제]韓銀-産銀-예금보험공사에 명화 수두룩한 이유는?

한국은행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 화폐박물관 내에 있는 한은갤러리에 소장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한은은 6·25전쟁 이후부터 하나둘씩 매입해온 작품들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2002년 한은갤러리를 개관했다. 이달부터는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별해 ‘가을을 그리다’를 주제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은행 제공
마르크 샤갈, 앙투안 부르델, 구사마 야요이, 백남준….

대형 미술관 기획전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이름 같지만 아니다. 그림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한국은행, KDB산업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보유한 작품의 작가들이다. 한은과 산은은 자체적으로 매입한 그림들이 1000점이 넘는다. 예보는 6000점에 가까운 작품들을 갖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실에 따르면, 3개 기관이 보유한 미술품 감정가를 모두 합하면 113억 원대에 이른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 수십억 원대의 미술 작품들을 소유한 ‘그림 부자’가 됐을까.


한은, 가난한 작가 도우려 매입

한은이 미술품을 보유한 이유를 추적해 가다 보면 우리의 슬픈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6·25전쟁이 막 끝나 폐허가 된 1950년대 대한민국에는 예술가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작가들은 생업에 뛰어들기 위해 그림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 정부가 나서 가난한 작가들의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돈이 돌던 곳이라고는 한은밖에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하나둘 사 모으기 시작한 한은은 미술계에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현재까지 한은이 매입한 작품은 총 1061점에 이른다. 감정가로 따지면 약 40억 원 수준이다.

한은이 소장한 작품들의 취득 일자는 대부분 1950, 60년대다. 처음부터 값비싼 작품들이 아니었다. 1세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감정가가 높아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소장한 작품 가운데 가장 고가인 것은 이상범 작가의 ‘야산귀로’(감정가 1억7000만 원)다. 이상범 작가는 국내 최초의 근대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 화과(畵科)를 졸업한 현대 한국화의 대가로 꼽힌다. 야산귀로는 시골 야산의 아름다운 정경을 담은 수묵담채화다. 이 작가가 눈 덮인 산촌의 풍경을 그린 ‘산촌한설’(1억5000만 원)도 한은 소유다.

한은 작품 중에는 일제의 문화통치 당시 입선한 작품도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부터 문화통치의 하나로 미술 작품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 김인승 작가의 ‘봄의 가락’(1억5000만 원)이 대표적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그림을 두 폭으로 나눠 표현했다. 이 작품은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했다. 첼로 연주가와 연주를 듣고 있는 처녀들의 모습을 통해 봄을 고대하는 분위기를 담아냈다.

이 밖에 성균관대 인근에 살던 도상봉 작가가 그린 ‘성균관 풍경’(1억 원),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에서 입선한 박항섭 작가의 ‘포도원의 하루’(3000만 원), 김은호 작가의 ‘풍악추명’(7000만 원) 등의 유명 작품도 눈길을 끈다.

한은의 화폐박물관은 이 작품들을 가지고 상설 전시를 한다. 이달부터는 ‘가을을 그리다’를 주제로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을 기획전시하고 있다.

화폐박물관 관계자는 “대부분 40∼60년 전 국내 미술이 태동할 무렵의 작품들”이라며 “전쟁 전후 당시 화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세계 유명 작가들 한눈에… 미술관 못지않아

KDB산업은행이 매입한 마르크 샤갈의 ‘자화상’(왼쪽)과 앙투안 부르델의 ‘머리가 있는 토르소’. KDB산업은행 제공
국내 예술계가 어려웠던 시절 한은이 나서 작가들의 작품을 매입하던 관행들이 1990년대에는 아예 법제화가 됐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는 건축주가 일정 규모(1만 m²) 이상 건물을 신축할 때 드는 건축비의 0.5∼0.7%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미술작품을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이 제도가 의무화된 1995년 이후 전국에 1만5000여 개, 약 1조1300억 원 규모의 미술작품이 설치됐다.

산은은 문화예술진흥법으로 미술품 매입이 의무화되기 훨씬 이전인 1950년대부터 미술작품들을 조금씩 매입해왔다. 현재 산은이 갖고 있는 전체 미술품은 1199점이다. 감정가 총액은 41억 원이 넘는다. 이 가운데 1990년대 이전 작품들은 산은갤러리에 보관돼 있다. 산은 본점에 60여 개가 걸려 있고, 전국 80여 개 지점에도 500개에 가까운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산은의 미술품 컬렉션은 작가 이름만 봐도 화려하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대표 설치미술 예술가인 백남준의 ‘동대문’(1억6000만 원), 앙투안 부르델의 ‘머리가 있는 토르소’(9500만 원), 마르크 샤갈의 ‘자화상’(2000만 원), 구사마 야요이의 ‘과일바구니’(350만 원) 등이 있다. 최고가 작품은 설치미술작가인 강익중의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6억6900만 원)다.


예보가 ‘그림 부자’인 서글픈 사연

예금보험공사가 보유한 미술작품 중에 감정가가 가장 높은 박수근 화백의 유화 ‘줄넘기하는 아이들’(7억 원). 줄넘기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희미한 형상이 유화물감으로 질감있게 잘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2008년 정부의 부실 저축은행 퇴출 과정에서 담보로 잡아 놓은 미술품을 예보가 압류해 관리하고 있다. 예금보험공사 제공
예보는 한은이나 산은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예보는 2011년 저축은행 부실 사태로 영업정지를 당한 저축은행에 대해 예금자 보호를 위해 담보물품 압류 명령을 내렸다. 저축은행들의 수장고를 열자 가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미술품들을 비롯해 여객선 및 벌크선 등 선박과 고가 외제차 등을 담보로 대출을 해준 정황들이 속속 드러났다.

억대 감정가를 자랑하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있었다. 이 가운데 미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인 제프 쿤스의 조각품 ‘마운드 오브 플라워’는 홍콩 경매에서 21억 원에 낙찰됐다. 현재 예보가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작품 가운데 가장 고가인 것은 한국의 대표 작가인 박수근의 ‘줄넘기하는 아이들’(7억 원)이다. 제프 쿤스의 ‘라일락 카우’(3억7500만 원), 포르투갈 작가인 조안나 바스콘셀로스의 ‘베티 붑’(2억 원), 중국 작가 웨민쥔(岳敏君)의 ‘삶’(1억7500만 원) 등도 고가에 속한다.

하지만 예보 소장 미술품은 대다수가 값을 제대로 받기가 어려운 작품들이다. 총 5161점을 갖고 있지만, 전체 감정가를 합한 액수는 약 32억 원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2872점을 매각해 215억 원을 현금화했다.

예보도 갖고 있는 작품들로 전시회를 연다. 다만 일반 관람객을 위한 전시라기보다는 경매를 앞두고 미리 보여주는 사전 전시회 성격이 강하다. 신형구 예보 복합자산회수실장은 “한은이나 산은이 자체 예산으로 그림을 매입한다면 예보는 처분해서 공적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소장의 주 목적이다”고 설명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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