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숨쉬는 화분과 혁신성장

배극인 산업부장

입력 2017-10-25 03:00 수정 2017-10-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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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부장
지난해 주말을 이용해 원예학원에 등록했다. 속속 죽어나가는 사무실 난(蘭) 때문이었다. 아무리 물을 주고 정성을 쏟아도 소용없었다. 학원은 난 줄초상의 주범으로 화분을 꼽았다. 아니나 다를까. 난 화분을 들어 바닥을 봤더니 십중팔구 콩알만 한 구멍만 몇 개 뚫려 있었었다. 구멍을 크게 뚫으면 운송 과정에서 파손 위험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화분 표면에는 유약까지 발라져 있었다. 난 뿌리가 통풍과 물 빠짐에 특히 민감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난이 질식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병든 난을 살릴 때 바닥 중앙에 물 빠짐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있고 표면에 숨구멍이 많은 ‘낙소분(樂燒盆)’에 옮겨 심는 이유다. 그런 다음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비료를 쓴다.

기업과 경제도 마찬가지다. 새싹을 틔우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화분에 담느냐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발상과 혁신이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더 그렇다. 현 정권 경제정책의 ‘숨은 설계자’로 평가받는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이 6월 출간한 ‘경제철학의 전환’에서 강조한 내용도 따지고 보면 숨쉬는 화분에 비유할 수 있다. 슘페터식 공급혁신을 통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기업가가 부단히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 조성을 강조했다. 생산의 3요소인 노동과 토지, 자본을 자유롭게 결합하면서 창조적 파괴를 할 수 있는 기업 환경을 마련해주자는 얘기다.

변 전 실장은 노동시장의 자유를 첫 손가락에 꼽으며 정규직 고용경직성 완화와 비정규직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를 주장했다. “일손이 달려도 사람 뽑기가 겁난다”(박동훈 르노삼성자동차 사장)는 한국의 노동시장 경직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물론 그가 노동자의 자유를 강조한 점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일자리를 잃어도 일정 수준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국민 기본 수요를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는 복지정책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다.

정부 정책은 설계자의 의도와 거꾸로 가고 있다. 특히 노동의 자유와 관련해 부작용을 알고도 밀어붙이는 역설의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무인 점포화를 촉진해 그나마 있던 파트타임 자리를 줄이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은 노조의 과잉 기대 속에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늘리지 못하면서 오히려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재계가 할 말도 못 하게 하는 분위기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경제 운용의 핸들을 꺾었다.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혁신성장을 동시에 추진해야 할 화두로 내걸었다. 바람직한 방향 전환이다. 하지만 관료들이 책상 서랍에서 정권에 따라 이름만 바꿔 꺼내놓는 페이퍼로 혁신성장이 가능하다면 한국은 벌써 혁신 선진국이 되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계획경제 시대의 관(官) 주도 처방전이 아니라 기업들이 자유롭게 혁신할 수 있는 숨쉬는 화분부터 마련해주는 일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 경제가 잘나가는 비결은 금융 재정정책에 이어 세 번째 화살로 불리는 성장 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과 기업인을 우대하고 이들의 숨통을 틔워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분위기 위에서 총리가 먼저 기업에 임금인상과 고용확대를 요구해도 기업들은 기꺼이 응했다. 우파 정권의 등장에 긴장했던 노동계도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야당이 선거 때마다 연전연패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에서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슘페터식 공급 혁신 전략이 나오길 기대한다.
 
배극인 산업부장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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