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이야기가 있는 마을] 백마상으로 다시 태어난 새끼백마의 효심

김원겸 기자

입력 2017-10-12 05:45 수정 2017-10-12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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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면 신금마을은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새벽에 백마상을 두고 당제를 지낸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백마상을 모신 사당, 청동 백마상, 당산제를 알리는 플래카드. 고흥(전남) |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10. 신금마을 ‘백마상 설화’

병으로 새끼 먼저 보내야 했던 어미백마
며칠 밤낮을 슬퍼하다 꿈에서 만난 새끼
매일 호암산 정상서 뛰어내리라고 부탁
신성시한 사람들 백마상 만들어 제 올려


오랜 세월 척박했던 땅. 그만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강하고 질긴 태도와 능력으로써만 세상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쌓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밝고 슬프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 설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쌓여 전해져오고 있다. 전남 고흥군을 다시 찾는 이유다. 지난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고흥의 이곳저곳 땅을 밟으며 다양한 이들을 만난 스포츠동아는 올해에도 그곳으로 간다. 사람들이 전하는 오랜 삶의 또렷한 흔적을 확인해가며 그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한다. 매달 두 차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나로우주해수욕장이 있는 고흥군 봉래면 신금마을은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새벽에 특별한 당제를 지낸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의 대상이 다름 아닌 백마(白馬)상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한 쌍의 작은 백마상은 나로도학생수련장 뒤편 숲에 자리한 사당에 곱게 모셔져있다. 신금마을의 조상은 예부터 북방 유목민족인 부여족으로 말을 소중히 여기고 신성하게 여겼다는데, 마을에서 백마상을 만들어 당제를 지내게 된 사연이 설화로 전해내려 온다.



● 백마신(白馬神)의 대를 이으려 동상이 된 새끼백마

어미백마는 새끼백마를 병으로 먼저 보내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다. 어미는 아들을 잃는 것도 가슴이 무너지지만, 대(代)가 끊기는 것도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새끼는 혼자 남게 될 어미를 더 걱정했다.

말을 신성시하던 부족이 생겨날 때부터 새끼백마의 조상은 대대로 사람들이 모시는 ‘백마신’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이어온 그 백마신의 대가 끊어지게 된 것이다. 새끼백마는 대를 이어갈 하나 뿐인 후손이었다.

새끼백마는 결국 죽고 말았다. 죽은 새끼 곁에서 어미는 하염없었다. 울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아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슬픔을 억누르며 해가 저물도록 새끼를 어루만져주었다. 새끼를 보낸 어미는 슬픔에 잠겨 식음을 전폐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럴수록 새끼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탈진해 누운 어미는 새끼를 그리워하다 잠이 들었다.

“엄마.”

놀란 어미가 눈을 떠보니 새끼가 앞에 있었다.

“이렇게 밥도 안 먹고 있으면 어떡해요. 그럼 제가 어떻게 편히 있겠어요.”

“너도 없고, 백마신의 대도 지키지 못했는데 무슨 염치로 살아가겠느냐.”

새끼는 기운 없는 어미를 안타깝게 쳐다보며 말했다.

“매일 밤 여기 호암산 정상에서 저 마을 앞산으로 뛰어내리세요. 아들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시고 꼭 들어주세요. 아셨죠?”

간절한 새끼의 부탁에 어미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산에 뛰어내리면 절대 그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새끼는 그렇게 당부하고 자기 머리털에 있는 몇 가닥 금빛 머리털 중 한 가닥을 뽑아 어미에게 주고 사라졌다.

잠에서 깬 어미는 꿈이었다는 생각에 실망했다. 그러다가 바닥에서 새끼가 꿈에서 준 금빛 머리털 한 가닥을 보았다. 어미는 그 금빛 머리털을 본 순간 ‘이건 그냥 꿈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당부대로 어미는 매일 호암산 정상에서 마을 앞산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한 아낙이 밤에 볼 일을 보러 방에서 나오다가 호암산 쪽에서 백마 한 마리가 마을 앞산으로 뛰어내리는 걸 보았다. 아낙은 깜짝 놀라 남편을 깨웠다. 남편이 보니 백마는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잘못 본 거 아니야?” “분명히 내가 이 두 눈으로 봤다니까요.”

남편은 아내가 잠에서 덜 깨 헛것을 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날이 밝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자기 아내뿐만 아니라 잠이 안 와 밖에서 서성이다 앞산으로 뛰어내리는 백마를 본 사람이 둘이나 더 있었다.

“혹시 모르니 오늘 밤 우리 지켜봅시다.”

마을 사람들은 밤이 되자 앞산이 잘 보이는 한 집에 모여 백마가 나타나는지 지켜보았다.

잠시 후 정말 백마 한 마리가 호암산 쪽에서 앞산으로 하얀 머리털을 휘날리며 뛰어내렸다. 마을 사람들은 함께 앞산으로 갔다. 아무리 뒤져봐도 말이 뛰어내린 흔적은 없었다. 며칠을 더 지켜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백마는 똑같이 뛰어내렸고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했다.

“우리 마을 조상들은 예부터 말을 소중히 여겼고 신성시하였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필시 조상님들이 우리에게 뭔가 깨우쳐주려고 그러는 게 아니겠소?” “우리 마을에는 아직 당제를 지내고 있지 않으니 백마상을 만들어 당제를 지내도록 하면 어떻소?”

마을 사람들은 백마상을 만들어 당제를 지내기로 했다. 곧 백마상이 만들어졌고 마을 사람들은 백마상 앞에서 당제를 지내게 됐다.

사람들 없는 늦은 밤 백마상 앞으로 온 어미백마는 아들이 왜 꿈에 나타나 자기에게 그런 일을 시켰는지 깨달았다. 백마상이 되어서라도 백마신의 대를 잇기 위한 것이었다. 어미는 백마상을 바라보다가 순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마상 얼굴이 꼭 새끼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어미는 그 백마상이 새끼백마상이라는 걸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마을에 백마상을 만들어놓고 당제를 지낸 뒤부터는 밤마다 일어났던 괴이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백마신을 섬긴 뒤부터는 마을에 효자도 많이 나고 더욱 살기 좋은 마을로 되었다고 한다.

신금마을 김문갑 이장은 “백마상 앞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매년 정월 초하루 지낸다”면서 “제주(祭主)는 흠결 없는 사람이 맡고 있다. 제주는 피를 보면 안 되기에 한 달 전부터 근신한다. 고기도 안 잡고 찬물로 샤워한다. 당제가 열리는 날에는 가축이 울지 않게 한다”고 소개했다.

백마상을 모신 신금마을의 늦여름 풍경은 평화로웠다.

※설화 참조 및 인용: ‘백마상이 된 새끼 백마’ 안오일, ‘고흥군 설화 동화’ 중


■ 설화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고흥(전남) | 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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