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firm&Biz]서울지방변호사회, 창립 110돌… ‘인권의 최후 보루’ 역할

동아일보

입력 2017-09-22 03:00 수정 2017-09-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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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옛 청와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인 김병로 선생. 동아일보DB(대법원)
국내 최초의 변호사 단체인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이찬희)가 23일 창립 110돌을 맞이했다. 전신인 ‘한성변호사회’가 1907년 9월 23일 설립된 이래 서울변호사회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격랑, 그 한복판에 줄곧 서 있었다. 서울변호사회의 역사는, 우리나라 변호사들의 역사 그 자체다.

일제강점기 변호사들은 법을 몰라 고통받던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론하면 항일운동을 함께 했다. 일본 총독부의 탄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옥고를 치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광복 이후에도 변호사들은 시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며 우리 사회의 등불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서울변호사회가 ‘사회정의’, ‘인권보호’를 중요한 가치로 삼는 것은 그 같은 선배 변호사들의 유산이다.


일제 치하 나라를 지킨 ‘3인 변호사’

암울했던 일제 치하 법정에 선 독립운동가들의 곁에는 항일 변호사들이 있었다. 광복 이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1887∼1964)은 독립운동가 변론에 앞장선 대표적 인사다. 김병로는 일본 유학 후 1919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후 여운형, 안창호 선생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광주 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을 변론하며 명성을 떨쳤다.

당시 김병로와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던 대표적 항일변호사로는 이인 선생(1896∼1979)과 허현 선생이 있다. 두 사람은 ‘의열단 사건’ 변론을 맡은 일로 유명하다. 세상은 이들의 호와 본명을 따 ‘3인 변호사’라고 불렀다. 김병로의 호인 가인(街人), 허현의 호인 긍인(兢人), 그리고 이인 선생의 본명에 모두 ‘인’자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3인 변호사는 조선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언제라도 달려가 무료변론을 해 ‘민족변호사’로 불렸다.

3인 변호사는 일본 총독부의 눈엣가시였던 까닭에 숱한 고초를 겪었다. 김병로와 허현은 국내 최대 항일민족운동단체 ‘신간회’에서 활동하다 체포됐다. 김병로는 석방됐지만 6개월 변호사 업무정직 징계처분을 받고 한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허현은 1년 6개월을 복역하고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했다. 이인은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 등이 주도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김병로와 이인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나라의 법률을 새로 세우는 데 중추적인 일을 했다. 미군정 때 김병로는 사법부장, 이인은 대법관과 검찰총장으로 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김병로가 초대 대법원장, 이인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일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정치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3인 가운데 나머지 한 명인 허현은 월북했다가 6·25전쟁 직후 물이 불어난 대령강(大寧江·평북 천마군 북동부의 천마산에서 발원해 청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변호사법이 공포된 건 대한제국 시대인 1905년(광무 9년)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첫 변호사시험이 실시됐다. 변호사제도가 본격 시행된 것이다.

최초의 변호사회는 서울변호사회의 전신인 한성변호사회다. 1907년 한성변호사회가 설립될 당시에는 전국의 변호사 수가 채 10명이 안 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상설 연합조직을 두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전조선변호사대회’를 열어 모이곤 했다. 한성변호사회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변호사들을 대표하는 조직이었다.

광복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전국적 변호사 조직인 ‘조선변호사회’가 생겼다. 조선변호사회는 기존의 모든 변호사회를 폐지하고 각 지역에 지방분회를 뒀다.

오늘날의 대한변호사협회가 정식으로 출범한 건 1952년이다. 3년 전인 1949년 설치근거인 대한민국 변호사법이 제정됐지만 6·25전쟁 때문에 설립이 늦어진 것이다. 당시 대한변협은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법무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역사만 놓고 따지자면 서울변호사회가 대한변협보다 45년 빨리 설립된 셈이다.

서울변호사회는 시대를 앞서갔던 선배 변호사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는 각오로 인권보호에 힘쓰고 있다.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로 실형을 선고받아 등록이 취소됐던 변호사의 재등록 신청을 받아들여 대한변협에 변호사 등록 적격 의견을 낸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찬희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획일적인 법 적용을 하는 대신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촉구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며 “서울변호사회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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