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의 잡학사전]생리를 왜 ‘마술’이라 부를까

황규인 기자

입력 2017-08-29 18:31 수정 2017-08-2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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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히로인 ‘헤르미온느 그레인저’를 연기 중인 엠마 왓슨. 동아일보DB

“제발 ‘마술’이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발암물질 생리대가 문제가 된 뒤 한 언론사에서 촬영한 동영상에 한 학생이 남긴 말입니다. 많고 많은 낱말 중에서 마술이 왜 생리를 뜻하는 표현이 된 걸까요?

정답은 ‘풍채 좋은 산타클로스가 붉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것’하고 같은 이유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반지 대명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고요. 아,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도 같은 이유죠. 그러니까 기업체 마케팅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한국인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저 응원 박수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공식 서포터즈 ‘붉은 악마’와 SK텔레콤의 마케팅이 만나 한국 문화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1990년대 중반 생리대 제조업체 D사는 “한달에 한번 여자는 마술에 걸린다”를 광고 카피로 앞세웠습니다. 제품 이름에 ‘매직(magic)’이 들어가는 데서 착안한 것. 이 광고가 인기를 끌면서 그 뒤로 생리를 마술 또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1994년 6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D사 광고. 동아일보DB


언제부터 대중이 ‘생리=매직’이라고 널리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2002년 세상에 나온 영화 ‘공공의 적’에 “여자는 왜 한 달에 한 번씩 그 매직에 걸린다 안 하요. 여자친구가 그날이 그날이어서 내가 대신 약국에 매직 사러 갔당께”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걸 토대로 2000년대 초반에는 확실히 이런 표현을 언중(言衆)이 널리 쓰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대사에 여자친구는 세 글자 비속어로 나옵니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칼잡이 ‘용만’ 역을 맡아 명품 조연 연기를 선보인 배우 유해진 씨(오른쪽). 동아일보DB


이 대사에도 ‘그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처럼 직접 언급하기 어쩐지 부끄러운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꿔 완곡하게 표현하는 건 퍽 일반적인 언어 현상입니다. 특히 생리를 뜻하는 낱말은 전 세계적으로 5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생리를 ‘딸기 주간(週間·Erdbeerwoche)’이라고 부르고, 미국인들은 ‘플로 이모(Aunt Flow)’라는 말을 씁니다. 바다 건너 영국하고 묘한 관계인 프랑스에는 “영국 군대가 도착했다(Les Anglais ont debarqu¤)”는 표현도 있다고 하네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와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 연합군이 1815년 벨기에 워털루에서 맞붙었고,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나폴레옹은 몰락했습니다. 그림은 영화 ‘워털루(1970)’ 한 장면. 동아일보DB


사실 ‘생리’라는 낱말도 완곡한 표현입니다. 생리(生理) 그 자체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 원리”(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라는 뜻입니다. 노벨 생리학상은 여성들이 한달에 한번 걸리는 마술에 대한 연구 공로로 받는 상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생리 = 월경(月經)’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생리학’ 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 동아일보DB


생리라는 표현을 월경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널리 쓰기 시작한 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1962년 신문 기사만 해도 “생리대 = 월경대”라고 별도로 설명할 정도였습니다. SBS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 중인 70대 어머니들은 생리를 자연스럽게 “멘스(menstruation)”라고 표현했죠.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 SBS 화면 캡처


일본에서도 ‘세이리(生理)’를 ‘겟게이(月經)’와 같은 뜻으로 씁니다. 한자문화권에서 생리를 월경이라고 쓰는 건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동아일보에 ‘생리기(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걸 보면 우리가 월경을 생리라고 부르는 건 일본 영향일 개연성이 큽니다.

일본어로 생리를 뜻하는 표현 중에는 ‘안네(アンネ)’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한국에서 생리를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생리용품 브랜드 중에 안네가 있었던 거죠. 이 브랜드가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 프랑크-소녀의 일기’에 생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안네 프랑크는 생리에 관해 쓴 세계 최초의 작가”라는 평가도 존재합니다.


안네 프랑크가 작성한 일기 원본. 이 일기는 2차 세계대전 회고록 중 최고로 손꼽힙니다. 동아일보DB


그러니까 월경을 월경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워 생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기도 참 어렵게 됐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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