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주의 날飛]비행기, 어디까지 날 수 있나?

이원주기자

입력 2017-08-06 12:55:00 수정 2017-08-06 13: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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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먼저 <이 글>을 읽고 보시면 조금 더 재미있습니다.

※ 관련기사: [데이터 비키니]비행기, 어디까지 타봤니?


‘데이터 비키니’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행기가 한 번 뜨면 16시간도 문제없이 날아가는 시대지만 소위 ‘발 묶인’ 비행기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래 사례를 한 번 보시죠.

2015년 8월 31일 아메리칸 항공 소속 AA 31편이 LA를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로 날아갑니다. 이날 비행에 쓴 비행기는 에어버스에서 만든 A321 항공기. 약 180명을 태울 수 있는 소형 비행기입니다.

2015년 8월 31일 LA에서 호놀룰루까지 비행한 아메리칸항공 소속 A321 항공기. (등록번호 N137AA). 사진 출처 : Plane Finder Database.

LA에서 호놀룰루까지 거리는 약 4200km. A321로는 조금 빠듯하긴 해도 충분히 날아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아메리칸항공은 이 노선에 보잉 757기를 투입했다가 13일 전인 8월 13일부터 A321 기종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비행기는 아무 문제없이 승객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지만 31일 하와이로 날아간 비행기는 착륙 직후 ‘돌아오지 못하는 비행기’가 됐죠. 정확하게는 승객을 태우지 못한 채 비행기를 텅텅 비워 본토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미 연방 항공청(FAA)이 안전 규정 위반을 이유로 승객 탑승을 막았기 때문이죠. 이날 비행한 비행기(등록번호 N137AA)는 심지어 당시 새로 만든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새 비행기’였는데도 말입니다.

LA-호놀룰루 항로. 거리 약 4200km, 비행시간 약 5시간 40분. 자료 출처 : Flightaware.com

FAA가 아메리칸 항공에 걸고 넘어진 안전 규정은 ‘회항 시간 증가 인증’ 규정입니다. 영어로는 EDTO(Extended Diversion Time Operation)이라고 부르죠. 얼마 전까지 미국 FAA에서는 ETOPS(ExTended OPerationS), 유럽항공안전청(EASA)에서는 LROPS(Long Range OPerationS)라고 다르게 불렀습니다. 구주과 미주에서 다르게 불리고 운영되던 규정을 2012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통합하면서 EDTO로 이름이 바뀐 겁니다. 현재는 EDTO와 ETOPS 용어를 섞어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최신 용어인 EDTO를 쓰겠습니다.

EDTO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비행기가 고장 났을 때 긴급하게 착륙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규정’입니다. 비행기가 날다가 한 쪽 엔진에 말썽이 생기면 몇 분 안에 근처 공항에 착륙할 수 있도록 비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공사는 각 비행기에 대해 EDTO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인증을 받은 항공기는 EDTO-120, EDTO-180 등의 ‘등급’이 매겨집니다. 숫자는 ‘분(分)’을 의미합니다.

제주항공 비행기에 표시된 EDTO 인증 표시. 다만 EDTO 인증을 받았다고 꼭 저 표시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진 출처 : 유튜브 영상 캡처

조금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EDTO-120 인증을 받은 항공기에 문제가 생기면 이 비행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120분 안에 근처 공항에 착륙해야 합니다. ICAO가 비행기의 모든 점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해당 비행기가 고장 났을 때 120분까지 안전하게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EDTO-180은 고장이 나도 3시간(180분)까지 날 수 있습니다. 인증을 받지 않은 비행기는? 기본적으로 EDTO-60 등급이 부여됩니다. 요즘 비행기는 1시간 정도는 무조건 버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는 뜻이죠.

EDTO 인증은 왜 받을까요. 한 마디로 ‘돈을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EDTO 등급이 낮은 비행기는 긴급 착륙할 수 있는 공항을 항상 주변에 두고 비행해야 합니다. 대양 횡단은 꿈도 못 꾸고 항상 육지 위나 해안선을 따라 비행해야 합니다. 비행 거리는 극단적으로 길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EDTO 등급이 높아지면 그만큼 비상 착륙 공항을 덜 찾아도 됩니다. 비행기는 최단거리로 날 수 있고, 그만큼 연료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EDTO 인증을 받지 않은(EDTO-60) 항공기와 추가 인증을 받은 항공기의 항로. 시간도 연료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실제 항공사들이 체감하는 느낌은 어떨까요. 세상에 EDTO-60 항공기만 있을 경우 우리는 민항기를 타고 하와이에 갈 수 없습니다. ‘반지의 제왕’ 고향인 뉴질랜드도, ‘모아이’로 유명한 칠레 이스터섬도 모두 갈라파고스가 됩니다. 하지만 EDTO-180인 항공기가 나서면, 여러분은 그 비행기를 타고 전체 지구의 95%를 날아다닐 수 있게 됩니다. 나머지 5%는 아무 것도 없는 바다 한복판입니다. 비행기가 내릴 수 있는 공항이 있다면 내릴 수 있습니다.

EDTO-60 항공기(위)와 EDTO-180 항공기의 비행 가능지역 비교. 초록색과 하얀색이 비행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자료 출처 :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아메리칸항공 사례로 돌아가 보죠. 이 항공사가 2015년 8월 31일 LA-호놀룰루 노선에 투입한 비행기는 이 EDTO 인증을 받지 않은 항공기였습니다. 당연히 등급은 60분. 하와이는커녕 미국 서부 해안선도 제대로 벗어날 수 없는 항공기로 승객을 실어 날랐던 겁니다. 아무 사고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바다 한 복판에서 결함이 생겼다면 큰일 날 뻔 한 상황이었죠.

EDTO 인증은 어떻게 받을까요. 한 마디로 ‘비행기와 항공사의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내려집니다. 보잉, 에어버스로 대표되는 비행기 제작사들의 제작 기술, 엔진을 만드는 엔진 제작사들의 제작 기술, 그리고 항공사의 운영·정비 노하우와 승무원들에 대한 내용까지 모두 평가됩니다. 같은 항공사가 가진 같은 비행기라고 해서 같은 등급을 받지 않죠.

항공기 제작사가 EDTO 인증을 받기 위한 조건들. 그 외에도 항공사의 여건과 인력 숙련도 등에 대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평가됩니다. 자료 출처 :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한국 국적기를 포함해 대륙간 노선을 운영하는 대형 항공사들은 대형기(복도가 두 개인 광동체기)를 중심으로 높은 EDTO 등급을 받기 위해 애를 씁니다. 최근 상업운항이 시작된 최신 기종 A350의 경우에는 EDTO-370 등급을 받기도 했죠.

‘6시간 10분’. 비행기가 한반도 상공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싱가포르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하진 않습니다.) 기술은 좋아지고, 비행기의 안전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휴가철입니다. 이번 여름 여러분들의 목적지는 어느 공항인가요.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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