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매거진]럭셔리 패션 ‘반항’을 입다

김현수 기자

입력 2017-07-20 03:00 수정 2017-07-20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 버버리와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가 협업한 2018년 봄여름 컬렉션. 버버리 제공
▲ 베트망의 2017년 봄여름 컬렉션. 사진 속 리복을 포함해 18개 브랜드와 협업한 컬렉션이다. 베트망 홈페이지

패션계의 협업, 컬래버레이션은 2000년대 들어 빠르게 확산됐다. 두 브랜드 사이에 ‘×’ 표시를 두고 홍보하는 사례는 이제 쉽게 볼 수 있다. 같은 업종은 물론 다른 업종 간 협업도 흔하다.

2000년대 럭셔리 브랜드의 협업 파트너들은 주로 예술가였다. 상업적이면서도 예술의 세계를 지향하는 럭셔리 브랜드 속성과 잘 맞았다. 예술의 실험정신과 새로움은 럭셔리 브랜드에 영감을 주곤 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테크놀로지와 럭셔리의 만남이 화제가 됐다. 2007년 LG전자와 프라다의 만남, ‘프라다폰’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요즘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찾는 것은 뭘까? 바로 뒷골목, 길거리 문화, 힙합 같은 ‘쿨(Cool)함’이다. 반항적인 젊은이들의 문화, 유스 컬처(Youth culture·젊음의 문화)가 주류 문화를 제치고 대세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럭셔리×뒷골목’ 전성시대…쿨함을 찾아서

디즈니는 협업의 ‘단골 손님’이다. 디즈니와 코치가 함께 만든 핸드백.코치 제공

슈프림은 1994년 창업자 제임스 제비아가 뉴욕 뒷골목의 스케이트 보더들을 위해 내놓은 브랜드다. 스케이터들의 문화가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반항적이고 무례한데 쿨한 느낌이다. 매주 목요일마다 신제품을 조금씩만 내놓는 방식도 독특하다. 매장 앞에는 전날부터 긴 줄이 늘어선다. 문이 열리면 순식간에 모든 제품이 팔리고 이후 이베이 등에서 2∼5배 비싸게 거래된다. 뉴욕타임스에 10대 딸을 둔 엄마 기자의 슈프림 쇼핑기가 실릴 정도였다.(그 기자는 결국 제품 구매에 실패했다.)

2000년에는 루이뷔통과 얼굴을 붉힌 일도 있었다. 슈프림이 루이뷔통의 모노그램을 동의 없이 무단 사용하자 루이뷔통은 법원에 사용금지 신청을 냈다.

17년 후 상이한 문화의 두 대표 브랜드가 만났다. 루이뷔통의 남성 컬렉션은 유례없는 관심과 박수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득템’한 사람들은 바쁘게 인스타그램에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박서원 ㈜두산 전무는 2일 인스타그램에 루이뷔통×슈프림의 후드티를 입은 셀카 사진을 올렸다.

킴 존스 루이뷔통 남성복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는 “뉴욕의 남자들 사이에서 슈프림을 빼놓고는 대화가 완성될 수 없다. 이번 협업은 업타운과 다운타운, 아티스트와 뮤지션, 친구와 영웅들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전통 럭셔리 하우스 버버리도 최근 쿨한 파트너와 손을 잡았다.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다. 루브친스키는 ‘포스트 소비에트 유스 스타일’을 표방한다. 한마디로 소련 해체 후의 러시아 뒷골목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신사와 러시아 반항아의 만남인 셈이다.

루브친스키는 지난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된 그의 2018 봄여름 컬렉션 런웨이에서 버버리와의 협업 디자인을 공개했다. 버버리의 대표적인 트렌치코트, 버버리체크 셔츠 등을 새롭게 해석한 8종의 남성복 제품을 선보였다. 이 중 오버사이즈 스타일로 재해석된 디자인은 버버리 브랜드 유산에 뿌리를 둔 현대적 재창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협업 제품은 내년 1월 판매될 예정이다.

발빠르게 루이뷔통X슈프림의 후드팀을 입고 사진을 올린 박서원 ㈜두산 전무. 인스타그램 캡처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총괄책임자(CCO)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버버리 아이코닉 디자인의 재해석은 영국 문화유산에 대한 존경심과 새로움이 느껴진다. 흥미진진하다”고 말했다. 루브친스키는 “버버리의 시대를 초월한 작품들은 우리의 현대적인 스트리트 웨어와 조화를 이뤘다”고 했다.

루브친스키는 지난해 스포츠 브랜드 휠라의 ‘부활’에도 일조했다. 지난해 그는 자신의 컬렉션에 휠라를 포함한 1990년대 유스컬처 브랜드의 로고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 옷은 켄달 제너 등 톱스타들이 입으며 화제를 모았다. 휠라는 다시 유스컬처의 상징이 됐다.

루브친스키에 앞서 옛 소련식 쿨함을 선보인 디자이너가 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베트망을 이끄는 조지아 출신 뎀나-구람 그바살리아 형제다. 파격적인 행보로 기존 하이패션의 룰을 깨고 있는 이들은 지난해 2017년 봄여름 컬렉션을 위해 무려 18개 브랜드와 협업했다. 각 분야의 대표 주자를 모았다고 한다. 신발은 마놀로 블라닉, 재킷은 브리오니, 청바지는 리바이스, 스포츠 웨어는 리복, 붐버재킷은 알파 인더스트리 등.

미국 온라인 패션지 더 컷에 따르면 그바살리아 형제는 마놀로 블라닉을 찾아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구두를 망가뜨릴 거예요. 괜찮으세요?” 블라닉은 “오, 너무 좋아요. 제발 제발 제발 망가뜨려 주세요!”

재킷 한 벌을 만드는 데 220단계를 거쳐야 하는 전통의 이탈리아 슈트 브리오니도 “편하게 만들어보자”는 베트망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바살리아 형제는 더 컷과의 인터뷰에서 “짧은 기간에 각 분야 최고 브랜드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참여 브랜드들은 시도해 보지 못한 파격적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 즐거웠다는 평이다. 윈윈의 협업이었다.

역사에 남을 패션 협업은

2015년 11월 줄서기 대란으로 화제를 모은 발망과 H&M의 협업. H&M 제공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오래도록 기억될 협업 사례들도 있다. 패션계에서 컬래버레이션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2000년대는 디지털 시대가 찾아오고, 명품 소비층이 젊어지던 시기다. 소비자는 새로움을 원했고 브랜드는 의외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연출하고자 했다.

과거에도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협업은 있었다. 1920∼193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협업해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랍스터가 그려진 이브닝 드레스다.

2000년대에도 예술가와 위트 있는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브랜드가 있다. 1997년 루이뷔통에 영입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제이콥스는 고상한 모노그램에 신선함을 불어넣고자 했다. 2003년 일본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 함께 만든 ‘멀티 모노그램’은 이렇게 탄생했다. 20대 젊은층이 명품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던 시기, 형형색색 멀티 모노그램은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2009년 스테판 스프라우스의 그래피티 백도 찬사를 받았다.
현대 미술계의 거장 제프 쿤스와 루이뷔통과의 협업, ‘마스터즈 컬렉션’. 배낭, 핸드백 등에 모나리자 등의 명작이 담겼다. 루이뷔통 제공

반면 현대 미술계의 거장 제프 쿤스와 루이뷔통의 협업 컬렉션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쿤스의 지휘 아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등 대가의 작품을 가방과 액세서리에 담았다. 올해 4월 공개되자 반응이 엇갈렸다. 미술관 기념품숍 가방에 왜 수백만 원 가격을 붙였냐는 비판과 예술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반면 원래 쿤스 작품의 첫 인상이 ‘지금 장난해?’라는 반응을 자아내는 것처럼 예술로 봐야 한다는 리뷰도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핸드백을 두고 이렇게 말이 많은 건 처음인 것 같다. 그게 포인트”라고 평했다. 논란 자체가 브랜드에 나쁠 게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화제가 됐다는 증거니까.

패션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협업의 파괴력을 일깨워준 브랜드가 있다. 스웨덴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 H&M이다. 2015년 11월 서울 명동이 아수라장이 된 ‘발망 대란’이 유명하다. H&M이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발망과 협업한 제품을 명동점을 포함한 국내 4개 주요 점포에서 판매하자 2, 3일 전부터 줄이 늘어섰다. 결국 1000명 정도 몰리자 방송사 카메라까지 총출동했다. 미디어들은 ‘발망 대란’이란 이름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H&M은 2004년 카를 라거펠트를 시작으로 매년 마르니, 알렉산더왕, 랑방, 발망, 겐조 등과 협업한 옷을 내놨다. 비싼 명품 브랜드를 SPA 가격대로 살 수 있으니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스산한 11월에 며칠을 노숙하며 기다리는 열혈 팬들을 보면서 온 국민이 발망을 알게 됐다. 두 회사 모두에 이득이 되는 협업이었다. 올해 H&M과 협업하는 디자이너는 어덤(ERDEM). 11월 2일 온라인과 오프라인 점포에서 동시 판매될 예정이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