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동아]“품질 최고” 창업주 정신 이어… 뿌리부터 건강한 제약기업

박진혜기자

입력 2017-07-19 03:00 수정 2017-07-19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50년 외길 제약업계 1세대 CEO…성공 밑바탕은 영업 때 배운 지혜…경영 내내 주요 약재 직접 골라…웰빙 바람 타고 ‘비타500’ 돌풍…‘옥수수수염차’ 등도 연이어 히트

24일은 광동제약 창업주 고(故) 최수부 회장이 타계한 지 4주기가 되는 날이다. 광동제약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충남 천안 선영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울 예정이다. 맨손으로 시작해 광동제약을 뿌리 깊은 나무로 키워낸 고 최 회장. 그의 경영철학과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고 최수부 광동제약 창업주는 어린 시절 영업을 하며 배운 지혜와 통찰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고 생전에 말해왔다.


시련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배짱과 열정

스물다섯 청년 최수부는 여덟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소년가장이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던 그는 작은 한방 제약사 영업사원으로 일한 것을 계기로 제약업과 인연을 맺었다. 물건을 팔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 벗고 찾아 나섰고, 한 번 물건을 산 고객은 끝까지 책임지고 관리하며 ‘영업왕’이란 별명까지 달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공대로를 달린 건 아니었다.

1960년 청년 최수부는 고려인삼산업사의 지점 면접에서 탈락했다. 미제 군용 점퍼 차림에 투박한 인상,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던 그가 떨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포기란 없었다. 그 길로 달걀 두 꾸러미를 사들고 장충동의 고려인삼산업사 지사장 집에 찾아간 건 유명한 일이다. 열두 살 때부터 시장에서 담배, 엿, 돼지 등 온갖 상품을 팔며 장사 수완을 익힌 그였다. 자신의 경험과 장점을 부각시켜 상대를 설득했다. 청년의 배짱과 열정을 본 지사장은 결국 그를 합격시켰다.


영업을 통한 지혜·통찰… 성공의 밑바탕 돼

최수부가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판매하게 된 제품은 바로 경옥고였다. ‘동의보감’에 그 처방과 효능이 기록된 대표적인 한방 의약품이자, 당시 고려인삼산업사가 생산하는 유일한 품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초보 영업사원이 개당 2만 환(대한제국 때의 화폐 단위)인 약을 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웬만한 회사원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비싼 보약이었다. 첫날 종일 문전박대를 당하던 최수부는 결국 을지로의 한 양복점 사장에게 두 통의 경옥고를 팔았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입사 첫해 영업왕에 오른 그는 퇴사하기까지 3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시절 최수부는 차를 잘 타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어 다녀야 더 많은 고객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발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여름에는 남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면도칼로 구두 끝을 절개해 환기통을 만들어야 했다. 밑창이 하도 닳아서 남들 1년 이상 신는 구두를 그는 2개월도 채 못 신었다.

생전 최 회장은 배고팠던 시절 영업을 하며 배운 지혜와 통찰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해왔다. 그가 남긴 “죽는 날까지 기꺼이 영업사원이고 싶다”는 말에 그 시절의 의미가 가득 배어있다.


‘최 씨 고집’으로 뿌리내린 최고 품질

1963년 광동제약사를 차린 최 회장은 경옥고를 창업 품목으로 정했다. 이때 만든 철칙은 무슨 일이 있어도 ‘최고의 품질’을 추구한다는 것. 좋은 약재를 구하기 위해 건재약방 수십 곳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재료를 확인하는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꿀, 인삼, 백복령 따위의 재료를 사오면 직원들 앞에 펼쳐놓고 좋은 약재의 기준을 설명하는 일도 그의 주요 일과였다. 모든 구성원이 정성 들여 약재를 고를 수 있도록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믿었기 때문이다.

1974년 탄생한 광동 우황청심원 역시 최고의 품질을 향한 그의 집념이 담긴 대표 제품이다. 핵심 원료인 사향과 우황은 당시 워낙 귀해 구하기 힘든 재료였고, 그만큼 엉터리가 많은 데다 품질도 천차만별이었다. 결국 그는 주요 재료를 구하기 위해 국내를 넘어 홍콩과 대만 등지까지 직접 돌아다녔다.

그뿐 아니라 재료를 구하고서도 최상품임을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에야 원료로 사용했다. 이후 회사를 경영하는 내내 그는 웅담, 사향, 우황 같은 주요 약재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골랐다. 50년간 이어온 원칙이었다.

“이제야말로 쌍화탕다운 쌍화탕이 나왔다!” 1975년 출시된 광동 쌍화탕의 진가를 제일 먼저 확인해준 건 약사들이었다. 당시 쌍화탕을 제조하는 회사는 열 군데가 넘었지만 지금처럼 인기 품목은 아니었다. 최 회장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최상의 재료를 이용해 ‘업그레이드된’ 쌍화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기존 50원 정도였던 쌍화탕 가격을 100원 내외로 책정해야 했다.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제품을 찾아줄지에 대한 걱정이 이어졌지만 기우였다. 약사들 사이에서 품질을 인정받아 출시 한두 달 만에 월 50만 병 이상 팔리는 인기 제품이 됐다. 품질에 대한 ‘반세기 최 씨 고집’이라는 타이틀은 창업주의 철학에서부터 뿌리내린 광동제약의 가치다.



‘한방의 세계화’ 싹 틔우다

세계 진출을 향한 꿈. 1980년대 들어 최 회장이 세운 목표였다. 광동제약이 해외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건 1981년 당시 작은 제약사였던 개풍양행의 일부 생산 품목을 인수하면서부터다. 개풍양행은 대(對)일본 수출권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당장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개풍양행의 경영 상황. 제조 허가가 취소되면 품목 허가가 취소되는 것은 물론, 일본 수출권 또한 자동 소멸된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최 회장은 곧바로 식품의약청의 고위 간부를 만나 광동제약이 개풍양행을 인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개풍양행이 이대로 문을 닫으면 어렵사리 따낸 일본 수출권을 버리게 되는 셈이니 ‘국가적 손실’이란 사실을 강조했다.

결국 광동제약은 ‘개풍 경옥고’의 생산·수출 허가권을 인수한다. 당시는 의약품 수출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경옥고가 일본행 배에 처음 실리던 날, 선적 장면이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시대를 앞선 비전과 특유의 추진력으로 ‘한방의 세계화’란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어려운 이웃과 나눈 사랑의 열매

1984년 봄, 최 회장은 서울시 약사회 회장의 전화를 받는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국토종단 마라톤 행사를 개최하는데, 후원자가 돼 달라는 요청이었다.

좋은 일에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지만 회사의 재정이 넉넉하지만은 않은 상황. 최 회장은 고민 끝에 당기 순이익의 20%에 달하는 거금을 쾌척하는 결단을 내린다. 당시 광동제약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기업들도 쉽게 나서지 못했던 ‘통 큰 결심’이었다. 제1회 심장병 어린이 돕기 국토종단 마라톤 행사는 광동제약의 후원으로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이후 광동제약은 심장병 어린이의 수술비와 치료비 후원을 지속해 지금까지 총 500여 명의 어린 생명을 살렸다. 수술받은 어린이의 안부를 묻기 위해 최 회장이 직접 병원을 찾기도 했고, 반대로 어린이들이 그를 만나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어린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는 “기업을 경영하는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2001년 출시와 동시에 마시는 비타민C 돌풍을 일으킨 ‘비타500’은 지금도 광동제약을 대표하는 제품이다.


외환위기란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나무

탄탄대로를 달리던 광동제약도 외환위기 때 시련을 겪었다. 1998년 4월 1차 부도를 맞게 된 것이다. 최 회장이 손수 나서서 가까스로 부도 위기를 막아냈지만 경영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광동제약 전 임직원이 1998년분 상여금을 전액 자진 반납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어 발족한 노사발전추진위원회는 승진승급 동결, 임금 동결, 상여금 반납, 30분 조기 출근과 일 더하기 운동 전개, 연장 수당 자진 반납 등을 통해 경영 정상화에 힘을 보탰다.

이에 최 회장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대표이사 주식 10만 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는 결단을 내렸다. 임직원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화답한 것이다. 급박했던 위기를 극복한 이후인 2000년에는 직원들이 자진 반납했던 상여금 전액을 다시 지급했다.

최 회장은 생전에 “노사는 결코 갑을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가 되면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동지라는 게 그의 지론. 국가적 경제위기에도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극복해나간 광동제약의 저력은 최 회장의 ‘노사화합’ 경영에서 비롯됐다.


‘비타500’으로 우뚝 서다

2000년대로 접어들며 사람들의 가치관이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이른바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건강하고 질 높은 삶을 위해 필수영양소가 함유된 청정식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만 갔다. 특히 피로해소에 좋은 비타민C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비타민C가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필수 성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시중에 나와 있는 비타민 제품들이 인기를 얻었고, 일부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1993년부터 비타민C 제품 개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던 광동제약에서는 이에 본격적인 제품화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 회장은 광동제약의 ‘제2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던 터였다.

“알약으로 복용하던 비타민C를 음료로 만들어보자.” 회의시간에 나온 아이디어가 출발이었다. 마시는 비타민C를 만들기로 한 후 최 회장은 연구팀에 첫맛과 끝맛, 목 넘김과 마시고 난 후의 잔존감까지 완벽한 제품을 주문했다. 수십 번 만들어진 시제품을 모두 직접 마셨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진다.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바로 ‘비타500’이다.

2001년 출시와 동시에 ‘마시는 비타민C’ 돌풍을 일으키며 국민적 사랑을 받은 비타500은 지금도 광동제약을 대표하는 제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동제약의 건강음료 노하우는 이후 옥수수수염차, 헛개차 등의 히트로 이어졌다. 맨땅에 씨앗을 뿌려 열매를 거둬들이듯 회사의 모든 일을 손수 챙겼던 최 회장은 향년 77세를 일기로 2013년 7월 24일 타계했다. 이제 그는 제약업계의 거목으로, 광동제약을 뿌리 깊은 나무로 만든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진혜 기자 jhpark1029@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