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철]사행산업으로 복지재원 마련한다고?

최영철 주간동아팀 차장

입력 2017-05-03 03:00 수정 2017-05-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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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주간동아팀 차장
‘복권의 경제적 효용성을 논하라.’ 대학 시절인 1988년 미시경제학 강의의 시험 문제였다. 교수는 ‘서민의 주머니를 털어 부족한 세수를 메우려는 정부의 꼼수’라는 답안에 최저 학점으로 응징했다. 통계와 수학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노태우 정권이 막 들어선 당시는 500원짜리 올림픽복권이 대세였는데, 전두환 정권이 88올림픽기금과 국민주택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83년부터 발행한 것이었다. 돈 없는 대학생에겐 생맥주 한 잔에 안주까지 먹을 수 있는 ‘거금’이었지만 날개 돋친 듯 팔렸다.

28년이 훌쩍 지난 요즘, 복권 종류는 로또를 비롯해 12종으로 늘었고 판매량 또한 폭증했다.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4조 원에 육박할 만큼 늘어,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그간 사행산업의 종류도 복권을 비롯해 경마, 카지노, 경륜, 경정, 체육진흥투표권, 소싸움 경기 등 7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이들 사행산업으로 벌어들인 돈만 약 22조 원(추정치)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6년(약 12조 원)과 비교하면 약 1.8배로 늘어난 수치다.

정부가 이들 사행산업을 통해 거둬들인 준조세도 천문학적이다. 2015년에만 약 6조 원 가까운 돈을 세금과 기금 명목으로 거둬들였다. 2000년보다 4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한 해 정부 예산의 약 1.5%에 달하는 돈이 복지와 고용 지원 등 정부 정책 수행이나 공익사업의 재원으로 사용된 것. 정부가 2000년 이후 16년 동안 사행산업을 통해 거둬들인 준조세만 63조 원에 가깝다.

경제 전문가들은 2015년 이후 사행산업 매출이 한 해 20조 원 이상으로 폭증한 이유를 “우리 국민의 경제적 고통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을 한 번에 탈출하려는 도구로 도박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올해 1분기 경제고통지수는 6.4로 2013년 초보다 60% 이상 올라갔다. 소비자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높아진 탓이다.

이런 ‘한탕주의’는 국민을 도박중독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만 20세 이상 성인 100명 중 5명은 도박중독 유병자(5.1%)로 나타났다. 인구수로는 197만 명. 중독의 피해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그 수도 많고 양상도 심각하며 이용률도 더 높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획재정부는 그간 금지했던 로또의 인터넷 판매와 신용카드 구매를 내년 말부터 허용하기로 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던 지난해 3월 국회에서 법이 개정된 데 따른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 확대를 정책 기조로 내세웠던 정부가 정작 예산이 부족해지자 사행산업을 통해 그 세수를 메우려 했다는 의구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실제 로또 수익금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공익사업 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땜질 처방이 새 정부에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막판 유세전에 돌입한 각 대선 후보들이 뾰족한 재원 마련 대책 없이 수십조 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한 복지와 고용지원 확대 공약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원 확보 방법으로 법인세·소득세 인상 등 증세와 불요불급한 예산 축소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각 경제주체의 심각한 반발이 예상돼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날로 번창하는 사행산업 탓에 국민이 도박중독에 시달리고 범죄자로 전락할 수 있는 현실에서, 사행산업 수익이 더 이상 정부 세수 확보의 새로운 쌈짓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영철 주간동아팀 차장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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