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2개 섬, 건축가들 하나씩 맡아 설계해볼 만”

강성휘기자

입력 2017-01-14 03:00 수정 2017-01-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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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건축가들과 함께 살펴 본 ‘관광상품’ 남해안

4일 경남 통영시 한산면 소매물도등대에서 바라본 소매물도 전경. 승효상 이로재건축사무소 대표를 비롯한 국내 유명 건축가 5명은 남해안을 세계적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 이달 초 ‘남해안 건축기행’을 떠났다. 남해안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지만 마구잡이식 개발이 이뤄지면서 관광지로서의 매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통영=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거대한 갤러리였다. 5일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남리에 위치한 달아전망대에 오르자 대매물도와 비진도, 소지도, 저도 등 다양한 모양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유유히 지나가는 배들은 캔버스 위에 흰 물감을 뿌리는 듯했다. 깎아지른 갈색 절벽과 그 위를 빼곡히 채운 푸르스름한 나무숲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감흥은 전망대를 내려서면서 이내 깨져버렸다. 고동색 나무판을 이어 붙인 전망대는 곳곳이 파이고 칠이 벗겨져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삐죽빼죽 계단식으로 이어진 전망대는 언덕의 유려한 곡선을 가렸다. 전망대 높이도 낮아 나무숲들이 시야를 막아섰다. 전망대가 ‘전망’을 망친 꼴이었다. 승효상 이로재건축사사무소 대표는 “마음 같아선 전망대 재료부터 다시 정해 새로 올리고 싶다”며 혀를 찼다.


“건축이 오히려 경관 해치는 꼴”

 남해안은 ‘원석’이다. 리아스식 해안(하천에 깎인 육지가 가라앉거나 해수면이 상승해 만들어진 해안)과 1352개에 달하는 섬들은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남해안에 위치한 지방자치단체들이 큰 그림 없이 제각각 개발에 나서면서 매력은 감춰지고 말았다.

 이에 해법을 마련해 보고자 동아일보는 이달 초 승 대표, 민현식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등 유명 건축가들과 경남 거제시 통영시 일대를 돌아봤다. ‘남해안 발전거점 기본구상’을 마련 중인 국토교통부와 국토연구원, 한국관광개발연구원 등 정부·기관 관계자들도 동행했다.

 5일 찾은 경남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바람의 언덕’. 풍차와 바람, 바다가 어우러진 절경이었지만 인근 항구에 똑같은 모양으로 다닥다닥 들어선 조립식 펜션이 ‘옥에 티’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게 지붕을 주황, 노랑, 파랑 등으로 칠한 탓에 경관 조화가 깨졌다.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제대로 된 건축가라면 주변과의 조화를 고려해 지붕색을 골랐어야 했다”며 “건축물의 색채나 외형과 관련한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자연환경과 건축물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그리스 산토리니는 시에서 건축물에 사용할 페인트 색상까지 정한다.

 천편일률적인 건물 모양도 문제였다. 통영은 크고 작은 섬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푸근한 느낌을 준다. 반면 커다란 섬이 드문드문 자리 잡은 거제는 선이 굵고 호방한 분위기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위치한 건축물은 이런 차이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영의 미륵산 전망대와 달아전망대, 거제의 여차·홍포 해안도로 전망대는 똑같은 재질과 색깔의 나무판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 이동원 한국관광개발연구원 소장은 “전망뿐 아니라 전망대까지 아름답기로 유명한 노르웨이 관광국립도로는 전망대마다 주변 경관에 맞춰 유리로 바닥을 만들거나 표면이 거친 철제로 전망대 난간을 만든다”고 소개했다.

 달아전망대 뒤편 낮은 언덕에 위치한 정자를 본 민 전 교수도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사방이 나무와 전망대로 막혀 있는 곳에 정자를 올렸다는 건 건축물 자체를 과시하려는 건축가의 욕심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섬은 하얀 도화지… “남해안 관통하는 큰 밑그림 세워야”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배를 타고 다도해 섬들을 둘러보며 이 지역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승효상 이로재건축사사무소 대표,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 임재용 오씨에이 대표, 조재원 공일스튜디오 대표, 민현식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아래쪽 사진은 경남 통영시 산양읍의 클럽이에스 통영리조트. 주변 환경 훼손을 최소화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다도해에 위치한 섬들은 예술작품처럼 저마다 담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 6·25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있던 용초도(龍草島), 두 개의 봉우리 사이를 잇는 해수욕장이 일품인 모래시계 모양의 비진도(比珍島), 섬에 있는 암자로 합천 해인사 스님들이 정기적으로 수련을 온다는 연꽃 모양의 섬 연화도(蓮花島)까지. 소매물도(小每勿島) 등대섬 아래로 절벽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청록색 바다, 하늘 속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 구름은 한데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됐다.

 건축물이 많은 연안과 달리 섬에서는 건축물을 세우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승 대표는 “섬은 하얀 도화지”라며 “무턱대고 붓을 대기보다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전체 도화지를 모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사전에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많은 섬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지 정부가 느슨한 수준에서 마스터플랜을 먼저 세워야 한다”며 “건축이나 조형물 계획 같은 디테일한 실천은 그 다음”이라고 덧붙였다.

 지역 환경과의 조화도 중요하다. ‘예술의 섬’으로 유명한 일본의 나오시마(直島)는 한때 운영이 중단된 구리 제련소로 인해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1989년 일본의 한 교육출판 기업이 문화예술을 이용해 섬의 재생을 추진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섬 설계를 맡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제임스 터렐과 같은 건축가와 작가들은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 결과 ‘지중미술관’ ‘베네세 하우스’ 같은 세계적인 건축물이 탄생했다. 승 대표는 “나오시마 사례에서 보듯 건축가에게 섬 설계를 맡기는 ‘1건축가 1섬 프로젝트’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섬을 관광상품으로 만들겠다며 주민들의 생활방식을 바꾸려 해서도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일몰을 보기 위해 4일 오후 접안한 통영의 추도(楸島) 선착장에는 특산물인 물메기를 말리는 건조대나 양식에 필요한 장비를 보관하는 녹슨 컨테이너, 고기잡이에 쓰는 커다란 그물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소 어수선한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재원 공일스튜디오 대표는 “주민들이 필요해서 만든 시설물들을 없애면 안 된다”며 “주민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도 행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한 번 그린 청사진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민 전 교수는 “10년 전에도 해안을 관광자원화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흐지부지됐다”며 “단기간에 호텔이나 리조트를 짓겠다는 성과주의 대신 정권이 바뀌어도 통용될 수 있는 비전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전문가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남해안 발전 계획을 마련할 방침이다. 박승기 국토부 동서남해안및내륙권발전기획단 기획관은 “전망대와 경관을 개선하는 사업부터 우선 추진하겠다”며 “남해안의 수려한 경관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통영·거제=강성휘기자 yol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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