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기자가 만난 사람]“골든타임 이미 지나… 내년 경제까지 망치면 회복 어려워”

박용기자

입력 2016-12-26 03:00:00 수정 2016-12-26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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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금융위원장 전광우

초대 금융위원장을 지낸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요즘 한국과 베트남 경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베트남 미래비전’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한국이 심각한 전환기이자 복합적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절대 빈곤에서 이만큼 살아온 것 자체가 많은 나라의 선망의 대상이다. 베트남에 한국의 경험을 전수하고 양국 관계를 격상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박용 기자
《 2010년 당시 전광우 국민연금공단 이사장(67)이 미국 뉴욕을 방문했다. 그가 묵던 힐턴 호텔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이 호텔을 소유한 세계 최대 사모펀드운용사인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69)이었다. 그는 “내 호텔에 머물러줘 고맙다”며 세계 3대 연기금이자 글로벌 증시의 ‘큰손’인 국민연금 이사장을 환대했다. 슈워츠먼 회장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경제 자문단인 전략정책포럼 위원장에 선임됐다. 전 전 이사장은 “최근 축하 e메일을 주고받았다. 조만간 트럼프 당선인의 경제정책 방향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초대 금융위원장을 지냈고 국내 금융인 중 대표적인 국제금융통으로 꼽히는 전 전 이사장을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 회의실에서 만났다. 》
 

 ―트럼프 경제팀에 월가 인사들이 대거 등용됐는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규제 완화, 감세,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시장 친화적, 성장 친화적 정책으로 가겠다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트럼프노믹스’의 효과는 6개월 정도 지나야 알 수 있을 텐데, 미국 주식시장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찍고 있다. 시장의 기대감이 미리 반영된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신설한 전략정책포럼에 금융인과 기업인 16명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

 “대통령과 기업인이 성장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가감 없이 토론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청와대 회의에 여러 번 가봤지만, 우린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일방적으로 지시한다. 기업인 ‘군기 잡기’나 정부 정책에 협조를 구하는 만남은 이젠 의미 없다. 현장 얘기를 듣겠다면 꼭 총수를 부를 필요도 없다.”


 ―트럼프식 경제 자문단이 필요하다는 건가.

 “필요하다고 본다. 과거의 폐쇄적이고 왜곡된 권력과 기업의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현장 목소리를 경청하겠다는 통치권자의 열린 마인드가 필요하다. 최근 ‘최순실 게이트’만 봐도 기업을 잡아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옛날 마인드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대통령이 기업 총수 누구를 만났다는 것이 특별검사의 수사 대상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2008년 초대 금융위원장이 됐을 때 민간 출신 최초의 금융부처 수장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미국은 재무장관 중 상당수가 외부 출신이다. 그래도 시스템이 잘 돌아간다. 영입된 민간 전문가가 경제 정책을 담당하고 테크노크라트 관료가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시스템이 돌아가기 어려운 구조다.”


 ―관료의 벽이 높아서인가. 

 “관료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시장의 역량을 믿고 자정 능력을 키우기보단 ‘시장 자율에 맡길 수 없다. 관치가 필요하다’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그러니 지그재그 식으로 간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그림을 내놔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들이 글로벌 톱 수준의 한국 기업인만큼 전문성과 비전을 보여 줄 수 있나.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에 살면서 마인드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이 바뀌어야 한다.”


 ―내년 한국 경제가 어렵다는 예측이 많다.


 “최악 수준으로 가고 있다. 3년 연속(2015∼2017년) 2%대 성장은 처음 있는 일이다. 심지어 내년 성장률이 2%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1998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보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높아지는 충격적인 일이 생길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대기업들은 특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정권 교체기의 정책과 규제의 불확실성 리스크도 크다. 한국의 1, 2대 수출국인 미국과 중국의 ‘주요 2개국(G2)’ 갈등이 증폭될 것이다. 복합적 위험요인이 엉켜 있다. 내년 외환위기 20주년을 반추하는 시점에서 그때 못지않게 질적으로 더 어려운 위기적 상황을 맞게 됐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앞으로 6개월 정도의 국정 공백이 경제에 치명적일 수 있다. 안보 측면에서는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게 아니라 국익과 자위권에 대한 확고한 스탠스를 보여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수출 다변화와 미국 현지 생산 등의 대응이 필요하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경제는 용수철과 같다. 오래 눌려 있으면 탄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내년 경제까지 망치면 재정을 풀고 온갖 노력을 다해도 활력을 회복하기 쉽지 않다.”


 ―경제 회복의 골든타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가.

 “골든타임은 이미 지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후손들에게 미안한 얘기인데, 우리가 역사적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정유년은 국가의 명운이 갈리는 역사적 기로가 될 것이다. 20년 전 외환위기의 국가적 수모와 국민적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당장 미국 금리 인상이 직격탄이 될 것이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으로 시장금리가 이미 오르고 있다. 1300조 원을 넘은 가계부채가 가장 큰 걱정이다.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 소득도 늘지 않고 빚 상환 부담이 커진다. 가장 걱정되는 건 취약계층이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부채가 금융자산보다 많은 자영업자, 저소득층 등 취약 계층에 대한 선제적, 선별적 채무조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채무조정은 도덕적 해이를 부를 수 있다.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당국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금리 인상의 폭탄이 이 계층에서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사회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 최근 가계부채가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을 통해 많이 늘었다. 이런 쪽도 각별히 관리해야 한다.”


 ―외국 자본 이탈 리스크도 크다.

 “외화 유동성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상황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니 은행, 기업의 외화 유동성 관리를 더 면밀하게 해야 한다. 금리가 오르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의 부담이 더 커진다. 구조조정에 속도를 더 내야 한다. 구조조정은 사회적 저항이 크다. 구조조정 촉진과 사회 안전망 확충에는 재정을 적극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


 ―금융논리에 치중해 해운업 구조조정에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다.


 “금융위 주도로 구조조정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걸 탓할 수는 없다. 해운업 구조조정을 금융위에만 미뤘다. 경제팀 모두가 구조조정 과정에 적극 참여해 최선의 방안을 도출하는 시스템적 노력이 부족했다는 시장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래도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은 좋은 편 아닌가.


 “과거 우리가 많이 써먹은 얘긴데, 이젠 좋다고만 말할 순 없다. 조선 해운 등 5개 취약 업종 외에도 전자와 자동차 등 핵심 산업의 경쟁력이 도전받고 있다. 정치시스템은 후진국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부 재정과 외화 유동성이 좋아 국가 신용등급이 높은 것이다. 국가 경제의 체질과 체력이 좋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한국 경제가 허약 체질로 바뀌고 있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내외 투자를 늘려 경제를 살리려면 정책 실행력, 일관성,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미국은 정권이 바뀌어도 최소한의 국가 경영 원칙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야 해외 투자자에게 믿음도 주고 투자도 촉진할 수 있다. 노동개혁에 반대한다든지 법인세를 높이자고 하면 투자자들의 마음에 와 닿을까. 국가 안위를 확보하겠다는 의지와 정책 방향이 안 보이는 곳에 누가 많은 돈을 투자하겠나.”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연금이 그런 일에 연루된 것으로 비춰진 것이 매우 유감이다. 국민연금과 삼성 측의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는지는 검찰이 수사 중이다. 근거 없는 의혹 제기는 삼가야 한다. 국민연금이 기금 운영 원칙에 따라 의견을 수렴해 투자 의사결정을 했다면 이를 존중하는 제도와 문화도 필요하다. 기금 운영에 관한 전문적 독립성, 정치적 중립성이 없으면 의혹과 혼란이 반복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전문성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핵심 인력이 떠나고 있다고 들었다. 지방 이전 영향도 있지만 전문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문화도 문제다. 국정조사에 복지부 감사원 등의 중복 감사도 많다. 금융권의 ‘낙하산 인사’도 큰 병폐다. 능력을 발휘해 ‘글로벌 스타’가 되기보다 줄타기를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나쁜 인센티브를 주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부터 전문성과 글로벌 역량을 갖춘, 시장 투자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을 선임해야 한다.”


 ―기금운영위원회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수준의 독립성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연기금 관련자가 국회에 불려 나오는 건 해외토픽 감이다. 금통위가 금리 결정을 잘못했다고 불러놓고 뭐라고 하진 않는다. 기금 운용위원들이 금통위원처럼 임기를 지키며 양심적이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외국 연기금은 다 그렇게 한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지나치면 기업 경영을 간섭할 수 있다고 우려한 적이 있다.


 “국민연금은 장기적 투자자로서 기업의 안정적 성장을 촉진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의결권 행사로 기업이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의결권 행사가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되면 오히려 기업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정부나 정권의 기조가 반기업적 분위기로 돌아섰을 때 ‘연금 사회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현재 9%인 국민연금 보험료율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저축해 놓으면 자식들의 부담이 덜하다. 정치인들은 표 떨어진다고 꺼리지만 미래세대를 위한 보험료율 현실화가 차기 정부에서 꼭 필요하다. 다만 취약 계층에 좀 더 주는 방향으로, 사회 안전망 역할을 확대하는 쪽으로 아이디어를 내 사회적 거부감을 줄일 필요가 있다.”
 

▼ 전광우 초대 금융위원장은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 경제학 석사, 경영학 석·박사
△1986∼1998년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1998∼2001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특보
△2007년 외교부 국제금융대사
△2008년 초대 금융위원회 위원장
△2009∼2013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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