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28년만의 재벌 청문회, 정경유착까지 대물림해서야

동아일보

입력 2016-12-07 00:00 수정 2016-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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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대기업 총수 9명이 출석한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가 열렸다. 미르·K스포츠재단의 774억 원 모금과 관련해 총수들은 “청와대의 요청을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힘들었다”며 강제성은 일부 인정하면서도 총수의 사면이나 경영 특혜 같은 대가성은 한결같이 부인했다. 삼성이 지난해 최순실 씨가 독일에 설립한 코레스포츠에 35억 원 상당을 송금한 데 대해서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들 말대로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독대 자리에서 재단에 돈을 바치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겠다는 식의 ‘거래’가 오가지 않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청와대 요청을 거부했다가 불이익을 겪을까 봐 ‘보험용’으로 돈을 냈다는 점까지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박 대통령이 2015년 7월 독대한 7개 그룹은 당면 현안을 지닌 곳들이었다. 그런데도 청문회에서 총수들이 모두 ‘대가성’을 부인한 것은 특검이 검토 중인 뇌물 공여 혐의에 엮이지 않기 위해서일 공산이 크다.

 기업들이 정권의 강제성 모금에 발뺌으로 일관해서는 다음 정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실제로 1988년 일해재단의 598억 원 모금을 조사한 ‘5공 청문회’에서도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정부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편안하게 하기 위해 시류에 따라 돈을 냈다”며 강제성을 인정했지만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은 모금 과정에서 강제성은 없고, 특혜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5공 비리 수사를 결론지었다.

 이번 청문회에서 정주영 같은 폭탄발언이 나오기는커녕 “기업이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던 김승연 한화 회장조차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다. 그러니 1988년 청문회에 섰던 삼성 현대차 SK LG 한진 롯데 총수의 2, 3세 경영인 6명이 28년이 지난 지금 또 정경유착을 질타하는 청문회에 서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죽하면 외신들이 구시대적인 한국의 정경유착 문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거론하겠는가.

 과거 정권에서도 강제성 기금 모금은 있었다. 하지만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청와대가 여러 가지 세세하게 참여했다는 게 (역대 정부의 기업 모금과의) 차이점”이라고 했다. 1970년대 재벌을 육성해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21세기 재벌의 팔을 비틀어 비선 실세의 배를 불려주려 했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의 비극이다. 어제 삼성과 SK LG가 탈(脫)전경련을 선언해 정경유착의 ‘거간꾼’ 전경련은 사실상 해체 수순으로 갈 가능성이 커졌다. 권력이 기업을 압박해 돈을 뜯는 준조세의 악습을 끊고 권력과 기업 모두 자성하면서 투명한 정경(政經) 관계를 새로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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