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꼴찌’ 반찬가게집 막내, 세계 최고 셰프를 꿈꾸다

임우선기자

입력 2016-11-19 03:00 수정 2016-11-2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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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리포트]‘세계 3대 요리학교’ 美 CIA 진학한 민요한

고3 시절 친구와 함께 서울의 한 대여공간에서 열린 지인의 파티 요리를 준비하고 있는 민요한 씨(왼쪽)의 모습. 민요한 씨 제공
 서울 광진구 자양동 자양골목전통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구수한 참기름 냄새와 흥정하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곳이다. 그 시장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아버지의 조그마한 반찬가게가 있다.

 5평 남짓한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일 손님들에게 손수 만든 반찬을 판다. 김치, 나물, 조림 등 모두 맛깔스러운 반찬이지만 그중에서도 닭볶음탕과 매콤한 오징어채무침이 가게의 간판 메뉴다. 미국에 온 뒤 가장 생각나는 엄마표 반찬들….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를 보며 가게 풍경을 떠올릴 때면 이곳에 와 있다는 게 더 꿈처럼 느껴진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나는 서울 광양고 교복을 입고 학교와 사글세 집을 오갔다. 전교생 300명 중 280등 언저리의 ‘꼴통’ 고3이었던 내가, 한때 영어 점수가 20점에 불과했던 내가, 세계 3대 요리학교이자 ‘요리계의 하버드대’로 불리는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 합격해 이렇게 미국 땅을 밟다니. 지금부터 나의 오랜 꿈과 그 꿈이 이끈 삶,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방 같은 집에서 키운 요리의 꿈

 내 이름은 민요한. 대한민국의 스무 살 청년이다. 기억 속 유년 시절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하시던 식당 옆 작은 가건물에 살았다. 거실이라고 해봐야 두 평 정도 됐을까. 그 ‘방 같은 집’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은 늘 새벽 4시, 5시에 집을 나가 밤 10시, 11시가 돼야 돌아오셨다. 잘은 모르지만 돈을 벌기 위해 두 분이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일을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지쳐 보였다. 어린 눈에도 ‘우리 엄마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낮에 집에 있는 식구라곤 누나와 나 둘뿐이어서 5학년쯤부터는 밥도 직접 해 먹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무엇보다 요리를 좋아했다는 거다. 왠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내 꿈은 늘 요리사였다.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라면과 인스턴트를 싫어했던 나는 한 끼를 먹어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었다. 당시 막 태동하던 인터넷 요리 콘텐츠는 나를 요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네이버의 유명 요리 블로그와 ‘키친’ 코너를 보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따라했다. 머리털 나고 지금껏 그 흔한 국영수 학원 한 번 안 다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뒤 긴 하루를 그렇게 요리 세계에 빠져 지냈다. 

 국영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에 흥미도, 소질도 없었다. 나는 내가 학업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일찍이 파악했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인정하셨다. 그 대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응원해 주셨다. 중학교 때는 좁디좁은 집의 방 하나를 ‘요리방’으로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청계천을 오가며 자재를 사다 직접 조리대를 만들어 주시고 조리도구를 챙겨 주시기도 했다.

 내가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한 건 중1 때다. 음식을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이론 공부는 정말 큰 난관이었다. 자격증을 따려면 이론부터 통과해야 하는데, 아무리 책을 봐도 이론을 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매번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무려 7번이나 이론 시험에 떨어졌다. 실기를 3, 4번 떨어졌다는 사람은 본 적이 있어도 이론 시험을 7번 떨어졌단 사람은 본 일이 없었다. 7cm 두께의 조리사 이론 책이 7000m 산보다 높게 느껴졌다.

 실기 응시 자격은 8번째 도전에서야 주어졌다. 중2 때 내 요리방 벽에 걸린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시작으로, 중3에 한식, 고등학교에 들어와 중식, 일식,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총 5개의 자격증을 모두 획득했다.


여행과 함께 자란 미국 유학의 꿈

 밤에 잠자리에 들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당장이라도 내 왼쪽 가슴에 ‘수석 셰프 민요한’이라는 명찰이 붙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고3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엔 부모님께 말 못할 꿈이 커졌다. 셰프라고 불리기에 앞서 세계 최고의 요리 명문 학교인 미국 CIA를 경험하고 싶다는 ‘유학의 꿈’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 유학? 누가 들어도 코웃음 칠 얘기였다. 첫째, 부모님 통장 잔액은 생활비 정도 말고 여윳돈이라곤 없었다. 둘째, 다른 과목도 그렇지만 내 영어 성적은 20점대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꼭 가고 싶었고 가서 잘할 자신이 있었다.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어려웠지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캄보디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회 봉사단을 따라갔던 것이다. 그 후 봉사단을 따라 수차례 해외에 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부모님께 선언했다.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어머니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요한아. 한 번쯤은 광야로 나가야지.”

 그렇게 나는 태국을 시작으로 미국, 중국, 라오스, 필리핀 등 15번 정도를 홀로 여행했다. 어머니는 늘 “지금 당장은 돈이 없지만 네가 떠날 때까지 만들어 보마”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든 그 약속을 지키셨다.

 유학 결심을 굳힌 고2 때 처음으로 영어책이 책상에 놓였다. 그리고 고2 때부터 고3 때까지, 1교시부터 7교시까지 하루 종일 오직 영어책만 팠다.

 첫날 단어 300개를 외우고 그 다음 날 전날 단어를 합쳐 600개, 그 다음 날 다시 900개를 쌓아가는 식으로 어휘를 늘렸다. 쉬는 시간에도 등하굣길에도 내 손에는 늘 작은 영어 단어장이 쥐여 있었다. 내가 다닌 광양고의 영어선생님은 “수시로 찾아와 물어봐주니 선생님이 더 좋다. 언제든 물어보고 꼭 원하는 셰프가 되도록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고3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영어 성적표에는 80점대가 찍혔다. 내 인생에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점수였다.

 영어선생님 권유로 요리대회에 출전해 1등을 하고 TV에 출연하는 행운도 얻었다. 선생님이 대회 광고를 보고 권한 보쌈 요리대회에 출전해 대상을 받은 후 EBS ‘학생 요리왕’ 선발대회를 비롯해 엉겁결에 케이블 요리채널이 주관하는 요리 서바이벌 ‘마스터 셰프’ 프로그램까지 출연했다.


부자(父子)의 꿈을 모아 CIA로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겠단 꿈은 날로 커졌다. 고3 때 그토록 만나고 싶던 스페인 출신의 미슐랭 3스타 셰프인 조르디 로카의 솔로 디너가 집에서 멀지 많은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스터에 적힌 입장료(식사 비용)는 60만 원.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봉투를 내밀었다.

 “요한아. 세어 봐. 아빠가 은행에 가서 찾아온 거야.” 1만 원권 60장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요한아. 이걸로 가고 싶은 거 예약해. 이 돈이 아빠에게 어떤 돈인 줄 알지?”

 그날 밤 나는 그곳에서 아름답고 향기롭고 우아한 세계를 봤다. 같은 광진구인데 우리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15년 여름 그간의 요리 경력과 자기소개서를 써서 CIA로 보냈다. 정리하다 보니 뜻밖에 경력인 줄도 몰랐던 봉사활동이 취업과 동일한 경력으로 인정됐다. 중3 때부터 3년간 매주 구청 카페에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제빵과 바리스타 기술을 가르쳐준 게 400시간이나 된 덕분이었다.

 가을이 지나고 찬 바람이 불 무렵, CIA로부터 한 통의 우편물이 왔다. 합격통지서였다. 단, 영어실력이 아직은 부족하니 연말까지 회화과정을 이수해 학교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어쨌든 그토록 갈망해온 CIA의 문이 진짜로 눈앞에 열린 것이다.


간절함이 열어준 미국 비자의 문

 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나와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가슴 졸이는 관문을 마주했다. 바로 CIA 유학을 위한 미국 비자(F1) 취득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F1 비자를 따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의 경제력’”이라고 했다. 통장에 1년 이상 3000만 원이 넘는 잔액이 있어야 하고, 제때 착실히 세금을 내 왔다는 증명도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중 우리 부자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 온 아버지 통장에는 단 한 번도 30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있은 적이 없다. 세금도 열에 아홉은 기한에 맞춰 내지 못했다. 장사가 안 되면 학교 급식비조차 제때 내지 못한 나였다.

 비자 서류를 준비하며 아버지는 “지금처럼 내 인생이 후회된 적이 없다”며 가슴을 치셨다. “요한아. 나 때문에 네가 미국에 못 가면 어떻게 하니. 나의 가난으로 너의 꿈이 꺾이고 나의 가난이 너에게 대물림될까 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는 비자 심사를 앞두고 한 달 이상을 하루 종일 단내 나게 구청과 은행, 지인들을 찾아 뛰며 조건을 하나둘 맞춰 나갔다.

 미국대사관 비자 인터뷰 당일, 순서를 기다리는 내 두 손에는 땀이 고였다. 앞서 인터뷰 한 12명이 줄줄이 비자 거부 통보를 받고 고개를 숙이며 나왔다. 심장이 요동쳤다. 나는 꼭 가야 하는데, 정말 가야 하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어눌한 영어지만 면접관에게 나의 절실한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가난해요. 하지만 제겐 꿈과 비전이 있어요. 제가 미국에 가서 온 힘을 다해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면접관은 나의 눈을 응시하며 여러 질문을 던진 뒤 이렇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세계적인 셰프가 돼서 미국에서 만납시다.” 대사관에서 나와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패스했어! 패스했어!” 수화기 너머 아버지는 엉엉 울고 계셨다.


세계를 누비는 미래를 그리며

올해 4월 민요한 씨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공항에서 찍은 가족사진(왼쪽). 민요한 씨가 중국 일본 태국 친구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30여 분 만에 뚝딱 만들어낸 찹스테이크와 토르티야, 스파게티. 민경기·민요한 씨 제공
 4월 25일. 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년 1월 시작하는 CIA 개강 전까지 외국인을 위한 영어교육과정(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준을 12단계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5단계 수준이었는데 요즘 나는 11단계 수업을 듣는다. 이달 평가 시험을 잘 보면 12월엔 최종 12단계 반 수업을 듣게 되고, 그러면 뉴욕 CIA 신입생이 된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의 시장을 돌아볼 때다. 이곳엔 정말 전 세계의 모든 식재료가 다 모여 있다. 태국 요리 재료부터 이슬람 요리, 미국 가정식 재료에 이르기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재료를 맛보고 요리해 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혼자 살지만 숙소의 공용 주방에서 내가 매일 저녁 만들어내는 요리는 8인분. ESL을 함께 듣는 친구들로부터 매일 한 명당 5달러의 재료비를 받고 반 친구들을 위한 저녁을 만든다. 친구들은 사먹는 것보다 싼값에 맛좋은 요리를 먹을 수 있고,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이런저런 식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중국, 일본, 태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에게 맛 평가를 받을 수 있고, 1달러씩 팁도 챙길 수 있어 재미가 쏠쏠하다. CIA에 가면 요리사의 꿈을 가진 세계 여러 곳의 친구들을 만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새로운 요리에 계속 도전하고 싶다.

 아버지의 반찬가게와 나의 주방에는 오늘도 16시간의 시차를 두고 불이 켜진다. 나는 꿈을 위해, 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 오늘도 함께 불을 켠다.

임우선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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